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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리뷰] 퍼포논문에 대한 장르적 탐문, <셀프-리서치그라피>를 경유하여
이지혜 <셀프-리서치그라피>
김민관_아트신 편집장
제167호
2019.09.05
명명, 논문, 렉처 퍼포먼스
논문을 퍼포먼스로 전환하는 과정을 가져가는(“연극, 퍼포먼스 관련 최신 논문을 무대화하는 프로젝트”_허영균) ‘퍼포논문’, 곧 퍼포먼스와 논문을 결합한 이 이름은 다소 생경한데, 여기서 생산되는 공연들이 일시적인 기획형 플랫폼의 일환에 속하(고 사라지)는 보통의 공연들로 봐야 하는지 아님 나아가 하나의 장르적 변이까지를 염두에 두는 것인지 궁금증을 일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렉처 퍼포먼스로 소환되는 작업의 형태들과는 또 어떻게 유사하거나 다른 것일까라는 의문 역시 드는데, 그와 같이 생소한 명명을 다루기 위해 하나의 참조 지점으로서 렉처 퍼포먼스를 가져와 보고자 한다. 우선 ‘퍼포논문’은 어떤 퍼포먼스 혹은 공연에서 일종의 희곡이나 스코어로 기능하는 게 논문이라는 점이 주요한/중요한 부분이다.
논문은 책의 언어와는 다소 다르다. 그것은 현재의 과제를 다루기 위해 관련 학문/자료의 지난 역사와 주장들을 압축적으로 정리한다는 점에서 이미 있는 것들(과)의 연관 관계를 (재)구성하며, 어떤 논증을 위한 증거들을 종합한 글 뭉치라는 점에서 뚜렷한 방향성과 함께 방법론 자체가 내용의 일부로 드러나게 된다. 논문은 끊임없이 어떤 것을 말할 때 자신이 지시하는 방향을 잊지 않으려 하며, 자신이 있는 구역을 명확히 지시하려 한다. 논문은 무엇보다 주체(의 의도)가 포기되지 않는 임시 가설의 언어 공간이 아닐까.
현재 펼쳐지는 대부분의 렉처 퍼포먼스라 불리는 것들은 공연, 적어도 리얼리즘 연극과는 다르다. 그것은 무언가를 재현하고자 할 수 있지만, 재연으로서 기술을 최우선으로 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재연되지 않음을 재현하려는 게 아니라(‘이것은 완벽한 현실 또는 시공간이다.’) 결국에는 재연되고 있음마저도 재현하는 편이다(때로는 작업의 과정이 그 안에서 기술되기도 하는데, 이는 삶의 시간이 공연의 시간으로 연장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기술(記述)자는 현재를 펼쳐놓고 관객과 협상하는 자기 기술의 주체로서, 그 내용의 전달이 아닌 ‘현재(의 시간이 점층적으로 쌓이는 것 또는 흩어지는 것)’를 기술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목적한다.
퍼포논문의 주체는 자신이 쓴 논문의 저술자이다. 논문은 공연보다 선행하되, 공연은 논문을 새롭게 구성한다는 점에서, 또는 매체적으로 번역한다는 점에서 논문을 다시 쓰며 논문의 형식과 단절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논문의 공연 잠재성을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투명한 자기 기술의 언어로서 논문은 렉처 퍼포먼스에서 논지 전개상 형식적 차원의 확장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곧 퍼포논문을 하나의 새로운 장르 형식으로 두는 게 아닌, 렉처 퍼포먼스의 한 부류로 묶일 수 있음을 가설로 두고자 한다.
논문은 책의 언어와는 다소 다르다. 그것은 현재의 과제를 다루기 위해 관련 학문/자료의 지난 역사와 주장들을 압축적으로 정리한다는 점에서 이미 있는 것들(과)의 연관 관계를 (재)구성하며, 어떤 논증을 위한 증거들을 종합한 글 뭉치라는 점에서 뚜렷한 방향성과 함께 방법론 자체가 내용의 일부로 드러나게 된다. 논문은 끊임없이 어떤 것을 말할 때 자신이 지시하는 방향을 잊지 않으려 하며, 자신이 있는 구역을 명확히 지시하려 한다. 논문은 무엇보다 주체(의 의도)가 포기되지 않는 임시 가설의 언어 공간이 아닐까.
현재 펼쳐지는 대부분의 렉처 퍼포먼스라 불리는 것들은 공연, 적어도 리얼리즘 연극과는 다르다. 그것은 무언가를 재현하고자 할 수 있지만, 재연으로서 기술을 최우선으로 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재연되지 않음을 재현하려는 게 아니라(‘이것은 완벽한 현실 또는 시공간이다.’) 결국에는 재연되고 있음마저도 재현하는 편이다(때로는 작업의 과정이 그 안에서 기술되기도 하는데, 이는 삶의 시간이 공연의 시간으로 연장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기술(記述)자는 현재를 펼쳐놓고 관객과 협상하는 자기 기술의 주체로서, 그 내용의 전달이 아닌 ‘현재(의 시간이 점층적으로 쌓이는 것 또는 흩어지는 것)’를 기술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목적한다.
퍼포논문의 주체는 자신이 쓴 논문의 저술자이다. 논문은 공연보다 선행하되, 공연은 논문을 새롭게 구성한다는 점에서, 또는 매체적으로 번역한다는 점에서 논문을 다시 쓰며 논문의 형식과 단절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논문의 공연 잠재성을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투명한 자기 기술의 언어로서 논문은 렉처 퍼포먼스에서 논지 전개상 형식적 차원의 확장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곧 퍼포논문을 하나의 새로운 장르 형식으로 두는 게 아닌, 렉처 퍼포먼스의 한 부류로 묶일 수 있음을 가설로 두고자 한다.
논문과 공연을 서로를 어떻게 (재)구성하는가
<셀프-리서치그라피>에서 퍼포머 이지혜가 시노그라피(무대 공간[Skene]을 쓰다[-grapho]라는 그리스어 ‘skenographia’에서 유래한다)를 그 역사적 흐름으로 설명하는 것은 논문을 즉자적으로 말로 옮기는 것과 같다. 선형적 역사에서의 분기점들로 역사적 흐름을 판별함은 연극사 안의 시노그라피를 다루는 도식적인 관념의 재현에 가깝다. 다만 이지혜가 바닥에 놓고 표시한 사물과 글씨 들을 통해 이 공간 안의 작은 부피를 이룬다는 것은, 논문이 구현할 수 없는 실재적 공간감을 재현한다. 실은 이지혜의 질문은 이 공간을 어떻게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느냐로 수렴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 자신이 극장에서 일하며 무대 안에 있는 장비의 들고남에 따라 극장 바닥이 불균형해지는 걸 멀리서 눈으로 감별하고 바닥을 실제 조종해보던 시점을 이지혜가 이야기하면서부터 이 공연이 비로소 논문을 벗어나 시노그라피(로)의 감각이 선연해지는 이유이다. 곧 역사를 짧게 압축하는 시간은 오히려 논문을 그 자체로 참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여기서 관객에게 자기 논문을 그 바깥으로 다시 꺼내며 구술의 매끈한 언어로 바꾸는 이지혜의 존재를 충분히 배우로 치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공연 역시 온전히 한 명의 배우로 공연이 완성되는 건 아닌데, 여전히 마찬가지로 위임된 역할로서 스크린에서 이미지와 언어를 송출하는 오퍼레이터가 보이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극이 보통 독백보다는 회화(會話)의 형식을 띠는 데 반해 그리고 이는 관객에게 직접적이고 투명한 전달이 아닌 제4의 벽이라는 비가시적 경계상에서 재현되는 데 반해, 렉처 퍼포먼스는 전자의 형식을 가져가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이는 <셀프-리서치그라피>와 함께 두 번째 동일 극장에서 오른 <좁은 몸> 역시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결과적으로, 논문의 요약적 전달과 논문의 일차 재료인 작품에 대한 재기술, 그리고 앞선 극장의 현존적 체험으로서 지난 연극과의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신변잡기적 자기 경험의 기술이 협상하고 교차하며 퍼포논문을 구성한다. 먼저 선택된 논문은 「한태숙 연출작업의 특성 연구―시노그래피(scenography)의 관점을 중심으로―」로, 이에 대한 요약은 공연에서 일종의 전제가 되며 이후 다시 펼쳐지지 않는다. 곧 이지혜의 시노그라피가 현재 어떻게 구현되는지가, 역사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논문은 현재로 세공되는 데 실패하며 공연은 논문의 시간을 보존한다. 다음으로, 논문의 제목에 따라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한태숙 연출 작업의 시노그라피적 특성은 한태숙 연출의 연출관에서 유래하는가, 아님 무대미술가와의 적극적 협력을 통해 산출되는 것인가.’ 이런 지점에서 <셀프-리서치그라피>는 특별히 그 작품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낳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논문의 요약적 전달과 논문의 일차 재료인 작품에 대한 재기술, 그리고 앞선 극장의 현존적 체험으로서 지난 연극과의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신변잡기적 자기 경험의 기술이 협상하고 교차하며 퍼포논문을 구성한다. 먼저 선택된 논문은 「한태숙 연출작업의 특성 연구―시노그래피(scenography)의 관점을 중심으로―」로, 이에 대한 요약은 공연에서 일종의 전제가 되며 이후 다시 펼쳐지지 않는다. 곧 이지혜의 시노그라피가 현재 어떻게 구현되는지가, 역사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논문은 현재로 세공되는 데 실패하며 공연은 논문의 시간을 보존한다. 다음으로, 논문의 제목에 따라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한태숙 연출 작업의 시노그라피적 특성은 한태숙 연출의 연출관에서 유래하는가, 아님 무대미술가와의 적극적 협력을 통해 산출되는 것인가.’ 이런 지점에서 <셀프-리서치그라피>는 특별히 그 작품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낳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신변 기술적 발화는 전반부의 딱딱한 설명에 대응해 적절하게 관객 반응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은 관객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그렇지만 논문의 요약이 현재 이 공연에 대한 기술로 연장되거나 곧 시노그라피의 현재를 구성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또한 한태숙 연출의 작업은 짧게 기술되고 있는데, 여기서 시노그라피는 작업상 이야기 전개에서 주요한 특질을 이룰 수 있음은 설명되지만, 그리고 모형을 통해 재현되고는 있지만, 그 작업의 시노그라피가 영상의 재현을 넘어 체현되거나 작업이 가진 철학, 한태숙 연출의 작업관까지는 기술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앞서 말했듯 이 작업은 논문의 주요 참조자료에 대한 것이 아닌 퍼포머 본인의 시노그라피에 대한 생각, 극장 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탐구의 과정으로 노정된다.)
사실상 논문을 작업으로 구현하는 건 논문의 저자로서 그 논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익숙한 이가 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현하는 이가 논문 저자와 일치하는 것이 어떤 진정성의 측면을 담보한다는 것 이전에 배우의 매체와 특질을 형식적으로 잘 구현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물론 이지혜가 자신이 배우로서 역할을 연기했던 연극의 시작을 기술했지만, 현재는 배우의 정체성을 지난 시절의 그것으로 수렴시켜 해결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또한 논문을 공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점을 부각시킬 것인지, 단순히 논문의 요약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떤 점을 취사선택할지를 결정하는 건 논문을 쓴 이의 절대적 특권이 될 수 없다. 이는 공연에서의 연출 혹은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을 상기시키는데, 그러한 역할은 하나의 저자(원-저자)가 분기하고 연장되는 또 다른 시점에서의 재구성이 공연에서 필요함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마치 이지혜는 연극의 지난 경험으로 돌이켜 보며 논문의 저자가 아닌 배우로서 존립하기의 측면에서 연약한 정체성을 노출하는 동시에 연구자의 미래적 방향 아래 이를 방어하는 듯 보인다(이는 구체적으로 그가 공연자의 다음 단계를 지시하지는 않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측면의 자기 기술은 분명 논문 외의 것이며, 엄정한 틀을 갖는 논문이 허락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끌지만, 실제 시노그라피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거나 그것을 퍼포머의 관점에서 재정립하는 측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공허하며 잉여적이다.
사실상 논문을 작업으로 구현하는 건 논문의 저자로서 그 논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익숙한 이가 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현하는 이가 논문 저자와 일치하는 것이 어떤 진정성의 측면을 담보한다는 것 이전에 배우의 매체와 특질을 형식적으로 잘 구현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물론 이지혜가 자신이 배우로서 역할을 연기했던 연극의 시작을 기술했지만, 현재는 배우의 정체성을 지난 시절의 그것으로 수렴시켜 해결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또한 논문을 공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점을 부각시킬 것인지, 단순히 논문의 요약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떤 점을 취사선택할지를 결정하는 건 논문을 쓴 이의 절대적 특권이 될 수 없다. 이는 공연에서의 연출 혹은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을 상기시키는데, 그러한 역할은 하나의 저자(원-저자)가 분기하고 연장되는 또 다른 시점에서의 재구성이 공연에서 필요함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마치 이지혜는 연극의 지난 경험으로 돌이켜 보며 논문의 저자가 아닌 배우로서 존립하기의 측면에서 연약한 정체성을 노출하는 동시에 연구자의 미래적 방향 아래 이를 방어하는 듯 보인다(이는 구체적으로 그가 공연자의 다음 단계를 지시하지는 않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측면의 자기 기술은 분명 논문 외의 것이며, 엄정한 틀을 갖는 논문이 허락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끌지만, 실제 시노그라피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거나 그것을 퍼포머의 관점에서 재정립하는 측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공허하며 잉여적이다.

<좁은 문>의 경우, 성별화된 몸의 연극적 버전에 대한 담화, 또한 현실 버전의 여러 양상을 살펴보며 논문은 논문 안에서 구현되지 않은 것들을 발화하기 시작한다. 이는 이미 공연자이며 관련해서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과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2>와 같은 여러 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논문은 공연으로 확장되거나 공연을 보충하는 매개 지점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작업자와 연구자가 연동된 변신적 자아인 경우에, 그 스스로의 논문은 구체적인 작업의 토대나 보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 논문은 공연의 또 다른 주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물음은 이 두 공연의 비교를 통해 드러나는 바다.
수렴하는 이름, 확장되는 세계
표현의 기술 이전에 다양한 삶과 현실, 자기 경험의 레퍼런스를 작업으로 옮기는 배우, 연출, 작가의 경우, 공연에서 기술되지 않는 바는 그것이 논문의 형태는 아니라고 해도 다른 방식으로 기술되거나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퍼포논문의 두 사례는 이에 대한 시사점을 안긴다고 할 수 있다. 논문 이외의 자기 경험이 공연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면 ‘논문(으로)의 육화’가 작업이 되는 과정에서 논문으로 수렴하지 않으며, 논문으로부터 확장되어 논문 바깥으로 나오(며 다시 논문을 새롭게 가리키며 구성하)는 것―이를 퍼포논문이라는 하나의 장르적 명칭으로 새롭게 규정할 수 있을까―이 결국 공연에서 중요하다고 할 때, 논문이 단지 토대이자 재료로서 존재하는 걸 넘어, 그 자체로 공연을 위한 대본 혹은 스코어로 적확하게 또 최상의 자리에 위치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논문이 하나의 재료로 소모되고 사라지는 경우, 그 논문과 공연의 관계는 매우 허무해질 수 있다는 것(논문은 공연에서 규명되지 않을 것이다) 역시 분명할 것이다.

다시 퍼포논문의 명명으로 돌아와 보자. 렉처 퍼포먼스나 논문 퍼포먼스도 아닌 ?퍼포‘논문’이라는 명명은 이것이 퍼포먼스로 수렴되지 않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퍼포먼스의 어원이 par(per-)+fornir(provide)로, 어떤 것을 완벽히 제공한다, 곧 완수한다는 뜻이라고 할 때 퍼포/먼스라는 분절은 적확하지 않다. 이는 예컨대 두 음소간의 결합을 추구한 어떤 한국식 조어의 일환 정도로 보인다.
프로그램북의 설명에서 퍼포논문이 논문으로부터 퍼포먼스로의 전환을 의도함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이론의 언어”와 “현장의 언어”를 교차시켜 무대의 (새로운) 언어를 구성하고자 하는 기획임을 확인할 수 있으나, 이 작업의 형식과 장르적 균열 또는 재구성에 대한 언급은 찾기 어렵다. 이는 2년을 맞은 퍼포논문이 결국은 자신(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수렴될 수밖에 없는 운명 아래, 그에 대한 기획자의 관점 역시 중요하지만, 그보다 이 기획의 기원과 그것이 잠재코자 했던 바를 듣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의 측면이 더 크다. 곧 퍼포논문은 현실적으로는 장르의 언어이기 이전에 기획의 언어라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정형화된 포맷이 되는 경우 다른 수많은 기획이 그렇듯, 그 출발의 잠재성을 품은 이름은 조금씩 닳고 늙어가며 상투적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왜 ‘이론의 언어’로 논문이 선택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논문을 공연으로 ‘재’기술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문제는 논문의 기술(記述)도 논문을 단락시키는 공연의 기술(技術)도 아니다, 퍼포‘논문’이라는 그 이름의 운명에 따른다면. 공연의 언어가 논문의 언어만큼의 레퍼런스의 충만함과 정교한 언어의 밀도를 가질 수 있느냐가 퍼포논문의 또 다른 관건이 될 것이다, 곧 ‘렉처’ 퍼포먼스의 형식적 차원과도 맞물리는 하나의 지점으로서. 하지만 한 가지 간과된 것은 논문을 읽는 시간만큼 공연의 시간은 길지 않으며, 우리는 손 안을 벗어나는 크기의 물리적 공간 안에서 언어를 읽기보다 듣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지혜가 공간을 눈과 언어로 더듬어가는 과정, 곧 공연 자체의 시노그라피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며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적 차원에서 잠깐 존재했지만, 공연에서 다루는 시노그라피의 이론적 개념과 유기적인 조응을 띠지 못했다는 점이 물론 더 중요할 것이다.
프로그램북의 설명에서 퍼포논문이 논문으로부터 퍼포먼스로의 전환을 의도함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이론의 언어”와 “현장의 언어”를 교차시켜 무대의 (새로운) 언어를 구성하고자 하는 기획임을 확인할 수 있으나, 이 작업의 형식과 장르적 균열 또는 재구성에 대한 언급은 찾기 어렵다. 이는 2년을 맞은 퍼포논문이 결국은 자신(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수렴될 수밖에 없는 운명 아래, 그에 대한 기획자의 관점 역시 중요하지만, 그보다 이 기획의 기원과 그것이 잠재코자 했던 바를 듣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의 측면이 더 크다. 곧 퍼포논문은 현실적으로는 장르의 언어이기 이전에 기획의 언어라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정형화된 포맷이 되는 경우 다른 수많은 기획이 그렇듯, 그 출발의 잠재성을 품은 이름은 조금씩 닳고 늙어가며 상투적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왜 ‘이론의 언어’로 논문이 선택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논문을 공연으로 ‘재’기술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문제는 논문의 기술(記述)도 논문을 단락시키는 공연의 기술(技術)도 아니다, 퍼포‘논문’이라는 그 이름의 운명에 따른다면. 공연의 언어가 논문의 언어만큼의 레퍼런스의 충만함과 정교한 언어의 밀도를 가질 수 있느냐가 퍼포논문의 또 다른 관건이 될 것이다, 곧 ‘렉처’ 퍼포먼스의 형식적 차원과도 맞물리는 하나의 지점으로서. 하지만 한 가지 간과된 것은 논문을 읽는 시간만큼 공연의 시간은 길지 않으며, 우리는 손 안을 벗어나는 크기의 물리적 공간 안에서 언어를 읽기보다 듣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지혜가 공간을 눈과 언어로 더듬어가는 과정, 곧 공연 자체의 시노그라피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며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적 차원에서 잠깐 존재했지만, 공연에서 다루는 시노그라피의 이론적 개념과 유기적인 조응을 띠지 못했다는 점이 물론 더 중요할 것이다.

앞서 투명한 자기 기술의 언어로서 두 개의 퍼포논문이 갖는 렉처 퍼포먼스의 성격은, 현장이 지금 여기에서 발화되며 점검됨으로써 곧 이론과 현장이 교차됨으로써 동시대적 실물감을 안기는 바 크다. <좁은 문>에 비해 <셀프-리서치그라피>는 공연의 재현적 언어의 측면을 크게 고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그것은 한편으로 렉처와 렉처 퍼포먼스의 차이가 과연 무엇인지를 궁구하게 하는 측면에서 또한 의문을 남긴다. 결국 여기서 퍼포논문은 논문의 요약적 규명이 아닌, 논문을 쓰게 한 동력, 그리고 시노그라피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이야기에 들어 있던 이지혜의 자기 욕망에 대한 서사가 탐문되는 차원에서 전적으로 기술되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논문이 기술할 수 없는 것―곧 공연/퍼포먼스만이 기술할 수 있는 것, 동시에 논문을 재기술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였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사진제공: 삼일로창고극장 ⓒ박태양]
셀프-리서치그라피일자2019.08.16(금) ~ 08.18(일)장소삼일로창고극장저자이지혜구성/연출/출연이지혜무대김은유무대모형제작신나경(MINI-SNK)조명박유진영상김혜민조명오퍼레이터이상진영상오퍼레이터전정욱조연출박유림무대감독김소희삼일로창고극장관련정보http://www.nsac.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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