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thearti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1
https://www.youtube.com/watch?v=LZ5q_GZqFIM
[동시대 미술의 르포르타주](1) 백남준과 플럭서스 - 디아티스트
[디아티스트매거진=김민준] 20세기는 급변의 시기였고 우리는 많은 기념비적 예술가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국내외 모든 예술가들은 저항하고 소통했다...
www.theartist.co.kr
https://m.khan.co.kr/culture/art-architecture/article/201211092054585#c2b
[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10) 플럭서스
1950년대 말 폴록의 죽음과 함께 미국의 모더니즘 운동도 종말을 맞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에 대...
m.khan.co.kr
(10) 플럭서스
연극·음악·회화적 ‘창작 흐름’이 곧 작품… 백남준이 대표적 작가
1950년대 말 폴록의 죽음과 함께 미국의 모더니즘 운동도 종말을 맞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에 대한 그린버그의 관념은 오로지 순수 추상만을 모더니즘의 적자로 인정하는 매우 협소하고 독단적인 것이었다. 생명을 다한 모더니즘의 대안으로 부상한 것은 재스퍼 존스에서 시작하여 앤디 워홀에서 완성되는 팝아트. 추상표현주의의 주도자들이 정치적 급진주의자였다면, 팝아트는 소비 자본주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매우 체제 순응적인 운동이었다. 플럭서스는 이 두 흐름의 대안으로 등장했다.
■ 뒤샹과 케이지
추상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이 종언을 고하면서, 다다가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원천으로 부상한다. 이 네오다다의 흐름에 예술적 영감을 준 것이 바로 마르셀 뒤샹. 특히 1957~1959년 사이에 뉴욕의 뉴 스쿨에서 실험음악을 가르친 존 케이지는 뒤샹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의 수업에는 조지 마키우나스, 조지 브레히트, 라 모테 영, 딕 히긴스 등 훗날 플럭서스의 멤버가 될 이들이 참가했는데, 케이지를 통해 뒤샹에게로 주목하게 된다. 플럭서스는 자신을 ‘네오다다’로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오다다’라는 발상은 곧바로 원조 다다이스트의 반대에 부딪힌다. 마키우나스가 보낸 편지에 라울 하우스만은 이렇게 답했다. “독일의 네오다다이스트에 관한 당신의 언급에 대해 기꺼이 논평하죠. 나는 미국인들도 ‘네오다다이즘’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네오’라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고, ‘이즘’이라는 말은 구식이니까요. 왜 그냥 ‘플럭서스’라고 하지 않죠? 내게는 그게 더 나아 보여요. 그것은 새로운 것이고, 다다는 이미 역사 속에 들어갔으니까요.”

‘플럭서스’라는 말은 ‘흐르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fluere’에서 비롯됐다. 마키우나스는 이 말을 사전을 들춰보다가 우연히 찾아냈다고 한다. 이는 물론 사전에 칼을 찔러 그 칼끝이 닿은 데에 있는 낱말(‘다다’)을 운동의 이름으로 골랐다는 그 유명한 전설의 반복이다. 일찍이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하기에, 우리가 같은 강에 두 번 몸을 담을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플럭서스의 이벤트들(events)은 이 강물의 비유가 함축하는 우연성, 일회성, 일시성의 이미지와 일치한다.
1961년 마키우나스는 갑자기 뉴욕을 떠나 서독에 주둔 중인 미 공군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기 위해 비스바덴으로 이주한다. 그곳에는 이미 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따르는 전위적 음악가들이 존재했고, 1958년에는 케이지가 다녀간 바도 있어, 실험음악과 관련한 행위예술에 대한 관심은 이미 지대한 편이었다. 마키우나스는 해외 거주 미국인과 라인란트와 네덜란드의 작가들을 끌어 모아 이제는 전설이 된 일련의 이벤트를 개최한다. 이것이 플럭서스의 창세기다.

■ 정신병자들이 탈출했다
1962년 9월1일부터 23일까지 마키우나스는 요셉 보이스와 볼프 포스텔의 도움을 받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페스티벌(festum fluxorum)을 개최한다. 여기에는 히긴스, 브레히트, 백남준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참여했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은 필립 코너가 작곡한 ‘피아노 활동’. 이 곡의 악보는 ‘뽑거나 두드리라’ ‘물건을 떨어뜨리라’ ‘음향판을 때리라’ 등의 명령어로 이루어졌다. 연주가 끝났을 때 피아노는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서독의 언론은 이 사건을 “정신병자들이 탈출했다”고 보도했다.
케이지의 실험음악에서 출발했기에, 플럭서스의 작업은 ‘개념미술’에 ‘해프닝’을 결합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헨리 플린트는 플럭서스 예술을 “개념예술”로 규정하기도 했다. 라몬테 영의 작품(‘밥 모리스에게 보내는 콤퍼지션 1960 #10’)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었다. “직선을 하나 그리고 그것을 따라 가라.” 연주는 백남준이 맡았다. 그는 기다란 종이 두루마리를 바닥에 깔아놓고, 먹물에 머리를 담근 후 바닥에 엎드려 잉크 묻은 머리로 종이 위에 긴 선을 그렸다. 이는 물론 해프닝의 요소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은 자신의 퍼포먼스에 ‘머리를 위한 선(禪)’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악보와 실연이다. 물리적 오브제로서의 작품(기다란 선이 그려진 종이)은 별 의미가 없다. 퍼포먼스가 끝난 후 종이는 사실 내버려도 무방할 것이다. 보존해도 기껏해야 기록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질 것이다. 플럭서스는 고급예술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 속하는 레디메이드마저 해체시켜 버린다. 이 점에서 그것은 누보리얼리즘과 구별된다. 플럭서스의 ‘작품’은 사물이 아니라 흐름, 글자 그대로 플럭서스로 존재한다.
14회의 연주회로 이루어진 플럭서스 페스티벌은 ‘인터미디어’(intermedia)라는 플럭서스의 본질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시 백남준의 퍼포먼스로 돌아가 보자. 우선 여기에는 악보와 연주, 말하자면 음악적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 악보가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퍼포먼스의 문학적 성격을 말할 수 있다. 한편 머리에 잉크를 묻혀 종이 위에 선을 그린다는 점에서 거기에는 회화적 요소가 있다. 게다가 관객 앞에서 신체를 이용해 연기를 하는 것은 명백히 연극적 요소다.
■ 다다와 레프
“모든 것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오랜 꿈이다. 마키우나스는 흥미롭게도 이를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가장 급진적 날개인 ‘레프’(LEF·예술의 좌익전선)와 연결시킨다. 레프는 인민의 삶과 유리된 예술을 포기하고 인민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아틀리에를 떠나 아예 공장으로 들어간 바 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레프의 생산주의 노선은 예술을 생활 속에 실현하려는, 미술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시도였다.
“사회에서 예술가의 지위를 비전문적으로 만들기 위해 예술가의 불필요성과 관객의 자족성을 증명해야 하며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예술-오락은 단순하고, 재미있고, 꾸밈이 없으며 … 아무런 기술도 수많은 리허설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하며, 어떠한 상품 가치나 제도적 가치도 갖지 않아야 한다. 제한을 없애고, 대량생산하고,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결국 누구나 생산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예술-오락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한다.”
이 언급은 다다의 장난스러운 오락과 레프의 진지한 생산주의 노선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이 결합이 한편으로 플럭서스를 체제 순응적인 팝아트와 구별시켜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팝아트에 근접시켜 주기도 한다. 생각해 보라. 워홀 역시 아틀리에를 ‘공장’이라 부르고, 작품 제작을 대량생산에 맡기고, 고급예술과 일상생활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예술가의 주체성을 부정했다. 워홀이 꿈꾸는 사회 역시 “대중이 제작한 실크스크린이 내가 만든 것과 구별되지 않는 사회”가 아니었던가.

■ 플럭서스의 모순
플럭서스가 “상품이야말로 예술이 생산되고 지각될 수 있는 유일한 오브제 유형이자 유통”이라 정의한 것도 판단을 어렵게 한다. 실제로 마키우나스는 뉴욕에 플럭서스 숍을 열어, 플럭서스 작가들이 만든 오브제들을 판매하려 했다. 물론 거기에 진열된 상자나 기계장치, 대량생산된 싸구려 작품들은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이렇게 상업적 유통방식을 흉내 낸 것이 과연 예술을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인지, 자본주의적 유통을 비판하려는 농담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마키우나스는 다소 자조적인 목소리로 플럭서스를 “전위(avant-guard)와 ‘한 발 앞서는 경쟁을 하고 싶은 충동도 없는 후위(rear-guard)’ ”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1963년에 그가 작성한 ‘플럭서스 선언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추방: 부르주아의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 죽은 예술, 모방, 인위적 예술, 추상적인 예술, 환영적인 예술, 수학적인 예술의 세계를 추방하라. ‘유럽주의’ 세계를 추방하라.” 거의 미래파를 방불케 하는 아방가르드의 구호다.
할 포스터는 이와 더불어 또 다른 모순을 지적한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플럭서스는 “우연적 이벤트와 일시적 오브제를 미학적 표준”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는 “무한한 상품들 속에서 다른 모든 사물과 함께 예술적인 대상도 덧없고 일회적이며 폐기 가능한 영역으로 좌천시키는 뚜렷한 사회적 경향을 맹목적으로 지지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플럭서스가 하려던 그 일을, 문화산업이 이미 부정적인 맥락에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 플럭서스 이후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플럭서스는 이후에 펼쳐질 어떤 경향들의 맹아를 보여주었다. 플럭서스는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만난 최초의 예술운동이었다. 플럭서스의 인큐베이터였던 케이지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선(禪)에 심취해 있었고, 로베르 필리우는 1950년 한국부흥위원단(UNKRA)의 일원으로 한국에 배치되어 아시아 문화를 처음 접했다. 거기에 백남준을 비롯하여 구보다 시게코, 오노 요코, 시오미 미에코 등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이 참여함으로써 플럭서스는 진정한 의미의 국제적 운동이 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여성주의 예술의 맹아로 볼 만한 요소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플럭서스 퍼포먼스 중에서 시각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외려 여성 작가들의 것이었다. 가령 후에 존 레논의 부인이 된 오노 요코는 도쿄에서 ‘자르기 작품’(1964)이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무대에 다소곳이 앉은 그녀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이 걸친 옷을 가위로 조금씩 잘라내게 했다.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후에 백남준의 부인이 되는 구보다 시게코의 ‘버자이너 페인팅’(1965)으로, 여성이 성기에 붓을 꽂아 그림을 그린다는 내용이다.
플럭서스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인터미디어’의 경향이다.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참가했기에, 플럭서스의 작업은 자연스레 매체와 매체를 넘나드는 경향을 띤다. ‘플럭서스’라는 명칭 자체가 응고된 ‘작품’(work)보다는 시간 속에 흘러가는 ‘실행’(perform)을 지시한다. 그 결과 물리적 대상을 만드는 작업이었던 미술이 연극성과 음악성 사이에 있는 어떤 지점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실 오브제를 만들 때조차도 플럭서스의 작업에서는 언어학적 생산과 시각적 생산의 차이는 흐려진다.
화가나 조각가나 사진가의 구별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더 이상 매체에 구애받거나, 그것의 고유성을 고집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하면 드로잉을 하거나 페인팅을 할 수도 있지만, 필요하면 펜이나 붓 대신에 언제라도 카메라나 비디오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일상의 오브제로 설치 작업을 하거나, 혹은 자신의 신체로 퍼포먼스를 할 수도 있을 게다. 매체의 고유성과 순수성에 집착하던 모더니즘의 붕괴를 이보다 더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있을까?
공교롭게도 이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아날로그 매체들 사이에 존재하던 질적 차이를 지워버리는 오늘날의 기술적 조건과도 맞아 떨어진다. 플럭서스의 작가들은 텍스트와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를 자유로이 오갔다. 그 세 가지 모드로 상호 변환될 수 있는 것이 또한 디지털 매체의 특성이 아닌가. ‘플럭서스’는 그 이름이 함축하는 것처럼 문학적, 음악적, 연극적, 조형적으로 덧없는(ephemeral) 예술이었다. 디지털의 이미지 또한 그러하다.
https://ch.yes24.com/article/view/17226
백남준의 예술세계 ‘플럭서스’를 아시나요? - 『플럭서스 예술혁명』 전선자 | 예스24 채널예
플럭서스(Fluxus). 귀에 약간 익은 단어라면, 뮤지션에 대한 관심이 크거나, 뮤직레이블에 관심을 가진 경우일 수 있다. 이승렬, 클래지콰이, 윈터플레이, W 등 실력파 뮤지션들의 집합소, 플럭서스
ch.yes24.com
백남준의 예술세계 ‘플럭서스’를 아시나요? - 『플럭서스 예술혁명』 전선자
존 케이지, 백남준, 요제프 보이스. 세 사람의 예술 세계의 공통 모델은?
플럭서스(Fluxus). 귀에 약간 익은 단어라면, 뮤지션에 대한 관심이 크거나, 뮤직레이블에 관심을 가진 경우일 수 있다. 이승렬, 클래지콰이, 윈터플레이, W 등 실력파 뮤지션들의 집합소, 플럭서스가 떠오를 테니까.
플럭서스(Fluxus). 귀에 약간 익은 단어라면, 뮤지션에 대한 관심이 크거나, 뮤직레이블에 관심을 가진 경우일 수 있다. 이승렬, 클래지콰이, 윈터플레이, W 등 실력파 뮤지션들의 집합소, 플럭서스가 떠오를 테니까. 나는 백남준보다 음악기획사 플럭서스를 통해 플럭서스라는 이름을 먼저 접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플럭서스라는 이름을 기획사 명칭으로 정했을까. 이유가 있을 터. 플럭서스는 쉽게 말해, 흐름이다. 끊임없는 변화. 그러니까, 고이지 않겠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존의 음악을 넘어선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그것은 현대 예술사에서 플럭서스가 일군 성과다. 기존의 예술을 넘어서 본질주의 미학에 저항하겠다는 의지.
백남준을 비롯해 미국 음악가 존 케이지, 독일 미술작가 요셉 보이스가 그랬다. 물론 더 많은 예술가들이 있었지만, 『플럭서스 예술혁명』(조정환?전선자?김진호 지음|갈무리 펴냄)은 주로 그들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백남준은 비결정성과 변동성의 미학을 미디어를 통해 실현했으며, 케이지는 우연과 침묵, 소음을 통해 서구음악을 지배하던 구성주의적 전통에 저항했다. 보이스는 죽은 토끼의 심장을 걸어 놓은 후 에릭 사티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 예술적 행위에서 상황과 환경을 복원했다.
2011년, 플럭서스 예술가였던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됐다. 플럭서스 운동도 50년의 세월을 관통했으며, 플럭서스를 처음 주창한 조지 마키우나스의 탄생 70주년이다. 『플럭서스 예술혁명』은 그런 시기에 맞춰 플럭서스 예술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플럭서스의 면모를 살짝 엿보자면, 지난 1월 5주기를 맞이했던 백남준의 작품을 오는 15일부터 서울역 앞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스퀘어 전면의 미디어캔버스를 통해 작품이 상영된다.
한편 지난달 26일, 서울 동교동 ‘다중지성의 정원(www.daziwon.net)’에서 플럭서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플럭서스 예술혁명』의 저자 특별 강연회. 공저인 전선자 선생은 이날, 플럭서스 예술운동의 의미?역사와 주요 활동가들의 예술적 모색과 활동을 전했다.
플럭서스란 무엇인가
플럭서스라는 명칭을 어디선가 들어봤다면, 그것은 ‘백남준’이라는 이름에서 기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2008년 9월 ‘백남준 아트센터’가 개관 전시를 하면서 플럭서스가 예술분야와 관계된다는 사실이 조금 알려진 것.
그러나 플럭서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계기는 마련되지 않던 차, 2010년 초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벨기에 서적을 번역한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를 출간했다.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책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이 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책은 백남준에 대한 오판과 편견을 어느 정도 바로 잡게 해줬고, 백남준학을 연구하려면 플럭서스를 제대로 알아야한다는 것을 깨우쳐 줬다. 왜냐하면 플럭서스는 ? 시대의 흐름을 대변해 주는 예술인들의 사유이자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연구자들도 플럭서스에 대한 심화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고, 이 책도 그런 연장선상이다.”
그렇다면, 플럭서스(Fluxus)는 무슨 뜻일까. 라틴어로서, 흐름,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는 “만물은 창조의 흐름에서 유전한다”는 만물유전을 설파했고, 이 말에서 플럭서스는 유래했다.
의학에서도 이 용어가 사용되는데, 장내에서 배설물이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곧 장의 건강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흐름이 막히지 않는다’는 의미를 한 예술가가 차용했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조지 마키우나스. 그는 1960년경 전통적 예술형식과 양식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의 생각을 알리기 위해 잡지를 구상했는데, 이 잡지의 명칭이 플럭서스였다.
허나 잡지는 재정난으로 발간되지 못했고, 마키우나스는 1961년 뉴욕 메디슨가에 ‘AG’라는 화랑을 열었다. 여기서 전위 음악가, 화가, 시인들의 공동 콘서트를 열었다. 리차드 맥스필드, 잭슨 맥클로우, 헨리 플린트, 딕 히긴스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화랑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마키우나스는 독일로 갈 계획을 세우는데, 백남준과 서신 교환을 통해 자신이 플럭서스라는 이름의 예술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단어는 원래 마키우나스가 뉴욕에서 1960년경 전통적인 예술형식과 양식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의 생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상했던 잡지의 명칭이었으나, 그 잡지는 발간되지 못했다. 그래서 1962년 비스바덴에서 조직한 첫 공연시리즈 <가장 새로운 음악>에서 이 플럭서스라는 명칭이 맨 먼저 사용되었다. (p.134)
그처럼 미국과 유럽의 실험 예술가들은 상호교류를 하면서 변화에서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음을 공유했다. 1962년 초, 독일 비스바덴으로 온 조지 마키우나스는 백남준에게 밝혔던 바와 같이 같은 해 9월, 비스바덴 시립미술관에서 <플럭서스: 가장 새로운 음악의 세계적인 정기 축제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은 뚜렷한 원칙이나 방법론을 내세우지 않았고, 참여한 예술가들도 모였다가 다시 각자의 활동지로 돌아가고 재회하는 등 자유로운 참여 형식을 보였다.
플럭서스(Fluxus, ‘흐름’을 의미하는 라틴어)는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인 조지 마키우나스가 1961년 뉴욕에서 발원한 예술운동이다. (p.120)
플럭서스, 꿈틀대는 변화의 기운
“플럭서스는 행위예술의 한 형태다. 엘리트 예술을 반대하는 예술가들에 의해 1964년 이후 뉴욕 소호에서 예술집단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예술형태를 만들어갔다. 플럭서스는 직선적인 과학과 권위가 만들어놓은 신화를 깨고, 모든 전통개념에서 자유롭고, 창작자와 수용자가 일체가 되길 원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미래를 사유하며 사회를 변화시키길 바랐다. 변화에서만 새로운 것이 등장할 수 있다며,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첫 공식 공연은 플럭서스의 지향점이 잘 드러났다. 전위예술, 문학, 무대 예술 등 다양한 예술매체들이 상호 결합했다. 참가 예술가들은 딕 히긴스, 엘리스 놀즈, 요셉 보이스, 볼프 보스텔, 백남준, 에멧 윌리엄스, 아르투르 쾨프케, 로베르 필리우, 조지 마키오나스 등 9명이었다. 플럭서스 공연은 유럽을 순회했다.
이후 1963년 마키우나스는 뉴욕 소호에 플럭서스 본부를 창설했고, 64년부터 플럭서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현상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플럭서스는 일정한 범주를 정한다거나 목록화되진 않았다. 장르의 경계를 과감히 해체했고, 새로운 영역을 창조해냈다. 또, 당시 미수례의 주류 속에 안주하고 있던 표현주의나 추상 계열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위한 무한한 가능성의 저장고로도 여겨졌다.
플럭서스에 대한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독일의 토마스 슈미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마키우나스가 뉴욕으로 돌아간 후 곧 이것저것이 뒤섞인 불협화음으로 증발해 버렸다. 플럭서스에 관해 그리 많은 산만한 개념들이나 플럭서스에 실제 참여했든 안 했든 사람마다 플럭서스에서 저마다 다른 것을 찾아냈고, 또 오늘날에는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플럭서스를 들먹이며 플럭서스와 연관된 것을 주장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플럭서스는 예술이 오브제화,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투쟁이며 이로 인한 예술적 소외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p.13)
당시 많은 진술에 의하면,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가 사회적이며 반예술적인 관습을 ?표로 한다는 것을 확고히 규정하려고 했다. 반면 플럭서스 공연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플럭서스를 한정하려는 시도에 찬성하지 않았다. 열린 해석을 인정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된 플럭서스 공연전시가 1968년 스위스 베른과 뒤셀도르프에서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친구들이 친구들을 위해 만든 무엇’이었던 공연이었고, 이런 취지는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퍼포먼스를 추진하는데 필요한 원동력이 됐다.
친구들이 함께 만든 플럭서스
앞선 1962년 6월16일 뒤셀도르프 캄머슈필레 극장에서 열린 백남준의 공연이 이를 짐작케 한다. <음악에 있어서 네오-다다>라는 제목의 콘서트에서 백남준은 ‘바이올린 독주’를 했다. 그 퍼포먼스는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 올린 뒤 갑자기 내리쳐 산산이 부쉈다. 콘서트 후 요셉 보이스가 백남준에게 자신이 교수로 있는 뒤셀도르프 미술아카데미에서 공연을 열자고 제안했다. 첫째 날은 백남준의 개인전을, 둘째 날은 플럭서스 그룹전을 열자고.
백남준은 이 영광스러운 제안에 대해 뭐라고 답했을까. 저자에 의하면, 백남준은 8개월 후(1963년3월) 잡혀 있는 첫 개인전 준비로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플럭서스의 정신을 들어 개인전을 거절했다. 즉, 이틀 모두를 플럭서스 공연으로 채우자고 제안했다. 이유는 이랬다. “플럭서스는 모든 구성원이 똑같은 권리를 갖고, 개인의 자아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평등한 단체이니만큼 이틀 밤을 모두 플럭서스에 할애하자.” 보이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런 제안은 아무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백남준은 이 명예로운 기회를 플럭서스 친구들에게 할애했다. 플럭서스 모임의 일원으로서 플럭서스 취지에 맞게 플럭서스 친구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백남준의 의지에서 그들이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그들의 예술 활동에 원동력이 됐다. 그들은 돈도, 명성도 없었으며, 기존의 미술계는 그들을 무시했다. 당시의 언론들도 잡다한 소식을 담는 곳에 플럭서스 공연을 언급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엉터리로 기사를 싣곤 했다.
“플럭서스는 서로를 이해하는 예술가 친구들의 모임으로서 서로에게 보여줄 공연을 만드는 행사였다. 쾰른에서 언제나 혼자였던 백남준이 플럭서스 공연으로 친구를 만났고, 보이스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은둔의 작가였는데, 1963년 2월 플럭서스 공연에서 자신의 첫 개인 퍼포먼스를 거침없이 감행했다. 플럭서스 페스티벌은 정말 친구들이 친구들을 위해 만든 무엇이었고, 두 예술가에겐 플럭서스가 예술적으로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게 해준 매개체였다.”
존 케이지의 경우
마르셀 뒤샹은 가시적인 대상에서 해당돼 대상과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관계를 표출하려 애썼다. 미국의 음악가 존 케이지는 뒤샹의 이런 사고와 접목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그는 재료의 차원에서 하나의 혁신을 이뤘는데, 그가 몰두한 것은 새로운 소리였다.
이에 1938년의 작품 ‘바쿠스의 술잔치’, 1946~1948년의 ‘소나타와 간주곡’ 등에서 건반악기인 피아노를 타악기로 바꾸거나 다른 음식을 내는 악기로 바꿨다. 그것이 ‘조작된 또는 장치된 피아노’였으며, 특이한 장치의 피아노는 현들 사이에 고무, 종이, 나사, 못 등을 끼워 넣어 일종의 타악기관현악단이 내는 음색으로 변형됐다.
이어 1939년 자동차 브레이크, 통조림통, 조개껍질 등의 오브제들과 동물 소리들이 전통적인 타악기와 함께 사용된 곡들을 선보였다. ‘금속에 의한 첫 번째 구성’, ‘꽃’ 등에서 이런 청각적인 오브제를 사용했다. 또 1942년 전기발전기, 전축, 금속으로 된 롤러 등으로 음악적 악기가 아닌 것으로 소리를 만든 ‘상상적 풍경 3번’을, 1951년에는 12대의 라디오를 조작해서 소리를 만들어낸 ‘상상적 풍경 4번’을 만들어냈다.
“이런 작품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 작품들이 악보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대강의 지침이 지시돼 있는 정보체계로 존재한다. 재료의 혁신인 음악 영역 밖에 존재하는 소리로 완전히 다른 정보체계? 만드는 음악을 창작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특히 그는 제자에게 주역의 복사본을 선물 받고, 우연성의 개념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그를 다른 차원의 음악으로 이끌었다. 서양음악의 구조는 음악적 요소들을 인위적으로 구조화한 것인데, 케이지는 인위적으로 구조화된 전략을 내버리는 대신 우연에 의한 음악적 사건의 구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침묵 4분 33초’였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타임워치를 꺼내 4분33초를 기다리다가 그 시간이 지나면 타임워치를 끄고 뚜껑을 닫는 것이었다. 이 행위음악은 음악 영역 밖의 소리, 즉 소음, 잡음, 생활 속의 소리, 정적 등 그 시간에 우연히 일어난 음적인 사건들이 음색이 되어 음악을 이룬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관계들로 이뤄진 새로운 음악의 세계다. 요제프 보이스가 물질과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물질의 정신화를 추구하는 것은, 백남준이 기술과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기술의 인간화를 지향하는 것도 바로 케이지가 먼저 실천했던 자연의 작동방식을 모방하는 일, 즉 ‘우연성의 개념’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1958년 케이지의 강연을 통해 그의 음악세계를 접하고 번개를 맞은 듯 쇼크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 후 고전적 작곡에서 탈피, 가장 새로운 음악인 행위음악에 들어섰고, 1959년 11월 13일 뒤셀도르프에서 가진 데뷔 공연이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보내며>였다. 백남준은 플럭서스를 거쳐 미디어의 세계로 나아가지만, 초기 시절 받은 영향과 이 영향에서 출발하는 플럭서스 활동은 그의 예술 세계의 저변을 형성해 줬다.
자연에서 출발한 예술세계
존 케이지, 백남준, 요제프 보이스. 세 사람의 예술 세계의 모델은 자연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무한한 양과 영속적인 변화에 있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였다. 플럭서스의 의미처럼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 지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다. “19세기 사람들은 대부분 시각예술로 자신을 표현할 수단을 갖지 못했지만, 카메라의 발명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카메라의 등장은 누구나 시각예술가로 활동하게 있게끔 만들었고, 산업시장과 미술시장의 규모를 바꿔놓은 것은 사람들의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백남준은 봤다.
요제프 보이스는 1956년부터 제작한 <아우슈비츠에 관한 표명>에서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한 행위예술을 선보였다. 그가 사용한 재료는 물질(기름덩어리, 펠트천 등)이면서도 예술가로부터 정신성을 부여받은 오브제였다. 은둔 예술가였던 그는 1962년 6월 백남준과 만나면서 플럭서스의 활발한 구성원이 됐다.
“이들 실험 작가들은 자연의 작동방식인 순환과 반전, 우연과 필연, 그리고 만물유전을 따랐다. 어떤 원리나 방법론을 내세우지 않고, 인간 경험의 총체성과 결부된 표현을 추구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상이한 예술매체의 결합인 음악과 시각예술, 무대예술과 시 등을 융합한 ‘통합 양식개념’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며 플럭서스의 힘이다.”
현대미술관연구 제 12 집
Ⅰ. 전시를 개최하며 왜 다시 플럭서스인가? 1960년대초 “삶과 예술의 조화”라는 기치 하에 현존하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진정 자유로운 예술을 구현하고자 했던 이 한 무리 악동들의 굿거리를
www.mmca.go.kr
플럭서스 - 삶과 예술로 엮은 그물망 |
임대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I. 전시를 개최하며 II. 플럭서스의 형성 III. 플럭서스 행위예술 |
Ⅳ. 플럭서스 오브제 Ⅴ. 플럭서스의 특성 Ⅵ. 남겨진 의미 |
|
Ⅰ. 전시를 개최하며왜 다시 플럭서스인가? 1960년대초 “삶과 예술의 조화”라는 기치 하에 현존하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진정 자유로운 예술을 구현하고자 했던 이 한 무리 악동들의 굿거리를 기억하는 이들은 지금 21세기에 다시 이들을 거론하는 의미를 궁금해 할 법도 하다. 그러나 미래는 과거를 통하여만 존재하는 법. 지난 세기의 현대미술의 또 하나의 시원(始原)을 열었던 이 예술운동 ‘플럭서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은 다가올 예술의 전망에 대한 또 다른 밑그림이 될 것이다. 게다가 플럭서스는 당대의 일시적인 양식이라기보다는 지금도 제 2, 제 3세대의 작가들로 이어져 가고 있는 끈질긴 “예술정신”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1950년대말에서 60년대초에 형성되어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플럭서스’ 예술운동의 전개양상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특히, 당시 가장 활발한 중심 무대의 하나였던 독일 지역에 초점을 맞추어 이 곳을 중심으로 일어난 다양한 행위예술, 공연, 페스티벌, 각종 창작물과 그 다큐멘트 등을 통하여, 20세기 중·후반을 걸쳐 가장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예술운동 중 하나인 플럭서스의 진면모를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한편으로는 플럭서스 작가들과 그 친구들의 원작(原作) 350점-오브제, 악보, 스케치, 설치, 출판물 등을, 다른 한 편으로는 독일에서 열렸던 가장 중요한 플럭서스 공연들의 다큐멘트를 선보인다. 그리고 인쇄물과 사진자료들은 물론이고 흔히 접하기 힘든 영화필름과 플럭서스 음악 분야에서 창조된 다양한 예들도 함께 모았으며, 또한 당시 WDR(서독 라디오 방송국)을 위해 제작된 독특한 플럭서스 라디오극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지난 1993년 예술의 전당, 국립현대미술관, 주한독일문화원 등에서 열렸던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이 주로 생존작가들의 플럭서스 공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플럭서스와 독일 1962-1994”는 공연의 기록뿐 아니라 플럭서스의 다양한 오브제들과 공연의 결과물들을 포함함으로써 보다 폭넓고 다양한 시각으로 이 예술운동의 의미를 탐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플럭서스는 어느 특정한 측면만으로 전체를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거물망과 같은 존재이다. 마치 각각의 매듭을 통해 여러 가닥의 선들이 모아지고 갈라지면서 짜 나가는 그물과 같이 플럭서스는 작가, 행위, 공연, 작품, 기록물들이 함께 엮어지고 분화되어 가며 성장해 온 일종의 생명체와 같은 대상이므로 보다 종합적인 접근방법이 아니고서는 그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측면에서 ‘플럭서스’의 특성에 대한 포괄적인 소개로 한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독일에서의 플럭서스 활동에 초점을 맞춘 이번 전시의 성격에 대한 것은 독일어판 전시 도록에 실린 평문과 대담 등에서 이미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기획자 가브리엘 크냅스타인이 그 자신 주요한 플럭서스 후원자의 하나였던 요하네스 클래더스와 가진 대담은 1950년대말과 60년대를 통해 쾰른, 뒤셀도르프, 비스바덴 등 라인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독일에서의 초기 플럭서스 활동을 현장감있게 전해주고 있다. 또한 이나 코젠의 평문 “아방가르드의 관리자에서 플럭서스 지휘자로”는 플럭서스의 주요작가이자 조직가였던 조지 마키우나스의 독일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플럭서스의 특성을 고찰하고 있다. 르네 블록의 강연원고인 “플럭서스 음악: 일상적인 이벤트”는 플럭서스 행위작품들과 음악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플럭서스의 전개양상과 개괄적인 윤곽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또한, 무엇보다 예술과 삶의 거리를 좁히고 관객을 수용자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로 포함시키고자 했던 플럭서스 본연의 정신을 생각해 보아도, 플럭서스가 우리 개개인과의 네트워크 안에서 가지는 의미와 가능성들은 그만큼 다양하고 유동적인 채로 열려 있는 편이 오히려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Ⅱ. 플럭서스의 형성 플럭서스는 기본적으로 지극히 개성적인 작가들이 단지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모인 느슨한 연대이다. 따라서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 소위 플럭서스의 “형성기”에 작가들이 서로를 알아 가는 만남의 과정이야말로 어쩌면 플럭서스의 쇼킹한 행위예술 공연이나 오브제들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가들 간의 네트워크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플럭서스 작가인 토마스 슈미트의 다음 언급은 그 현기증나는 속도감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반 년 안에 루드비히 고세비츠를 사귀고, 쾨프케를 사귀고, 에멋 윌리엄스, 벤자민 페터슨, 조지 마키우나스, 알리슨 노울즈, 딕 히긴스를 사귀고, (이 모든 만남은 얼마 전 우연히 백남준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다음에 조지 브레히트를 사귄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페스티벌이다!”1) 이 전시의 최초 기획자이자 그 자신 60-70년대 플럭서스 운동의 주요 후원자였던 르네 블록 역시 “생각해 보면, 서로 다른 도시, 국가, 대륙에 살던 작가들 사이에 그토록 밀도 있는 정보망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형성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회고하고 있다.2) 이 시기의 중요한 매듭점은 주로 뉴욕과 다름쉬타트, 뒤셀도르프, 쾰른, 부퍼탈, 비스바덴, 베를린 등의 독일 도시들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연결망은 일본, 파리, 암스테르담, 코펜하겐, 런던, 스톡홀름, 프라하, 마드리드 등지로 빠르게 번져나갔다.3) 플럭서스 작가들은 주로 여행과 서신교환을 통하여, 창작 아이디어와 행위작업 스코어, 소품 콜라쥬, 짧은 시(詩), 콘서트 일정, 주소록 등을 상호 교환했다. 그렇게 형성되어간 일군의 작가들은 뉴욕에서 독일로 건너온 리투아니아인 조지 마키우나스의 가세를 계기로 어떤 ‘구심점’을 가진 집단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의 연대표시 ‘1962-1994’가 암시하듯, 흔히 공식적인 플럭서스의 출발점을 1962년 마키우나스의 주도 하에 비스바덴 시립 미술관에서 개최된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페스티벌(FLUXUS-Internationale Festspiele Neuester Musik)”(도판1)로 잡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즉 이 페스티벌을 계기로 개별적인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하나의 ‘운동’으로 묶을 수 있는 조직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시각이다.4) ‘플럭서스’란 명칭 역시 여기서 처음 선보인 후, 이어서 열리게 되는 유럽, 미국, 일본 등지에서의 각종 콘서트, 이벤트, 선언문, 출판물 등에서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면서 이 작가들의 공통적인 특성을 짚어내는 하나의 단위로 정착되어갔다. 그러나 당시 플럭서스의 출발점에 함께 서 있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이 특정한 예술 경향이 그 페스티벌보다 최소한 3-4년은 앞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기본적으로 마키우나스가 이끄는 조직적인 국면으로 전개되기에 앞서 이미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노력들이 선행되었다는 뜻이다. 특히, 역시 플럭서스의 한 멤버이자 라인지역에서 이루어진 플럭서스 초기 활동에 깊이 관여했던 요하네스 클레더스는 플럭서스 초기단계에서 독일 내의 자생적인 형성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플럭서스를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백남준, 볼프 포스텔 등의 작가들과 장 피에르 빌헬름, 롤프 얄링 등의 화랑주들이 쾰른, 뒤셀도르프 등지에서 벌인 활동을 통해 전개된 운동으로 인식하고 있다... 나중에야 케이지와 마키우나스의 활동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나로서는 미국의 플럭서스 운동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5) 요셉 보이스 역시 “플럭서스는 1962년 내가 백남준과 얘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키우나스를 만났다”고 회상하며 애써 마키우나스의 역할을 축소시키고자 하기도 했다.6) 실제로 1958년에 열린 “새로운 음악을 위한 국제 하기강좌”와 쾰른 WDR (서독 라디오 방송국)과 뒤셀도르프의 장-피에르 빌헬름의 “갤러리 22”에서 개최한 여러 콘서트들은 독일의 플럭서스 활동의 직접적인 전조(前兆)였다. 이런 행사들을 통하여, 주로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젊은 작가들 그리고 장르를 초월하여 작업하던 예술가들과 뉴욕의 예술계 사이의 활발한 교류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Ⅲ. 플럭서스 행위예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럭서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또 이를 계기로 유럽과 미국의 여러 도시들로 확장시키는 데 있어서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벌’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다양한 “행위음악” 작품과 “이벤트”, “구체(具體) 음악” 작곡들, 그리고 녹음음악 콘서트로 진행된 4주간의 공연은 실로 그 때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져 온 이 특정 경향의 예술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만했다. (비록 공연된 작품 상당수가 예전에 이미 발표되었던 것이긴 했지만.) 이 때 소개된 작품들 상당수가 이후 플럭서스 작품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만한 특성들 - 짧고 함축적인 구성, 익살스러운 놀이정신, 우연성, 소리의 시각화 등 - 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7)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올렸다가 갑자기 내려쳐 부수어 버리는 백남준의 , 피아노를 톱질하고 분해하여 결국 산산조각 내는 필립 코너의 <피아노 작품>(도판2), 단지 불을 켰다 끄는 동작만 반복하는 조지 브레히트의 <3개의 램프 이벤트> 등은 세간의 화제를 불러모으기에 충분했다. 딕 히긴스는 1964년 섬싱 엘스(Something Else) 출판사에서 나온 자신의 저서 “Postface”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비스바덴 페스티벌의 멋진 점은 시간을 걱정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다른 페스티벌에서라면 제외되었을 끔찍하게 긴 작품들 상당수를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멋 윌리엄즈의 독일어 오페라 <그래 여전히 거기 있어 (Ja, es war noch da)>도 공연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경험한 가장 긴 45분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로 미리 정해진 숫자만큼 규칙적인 리듬으로 판을 두드리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8) 비스바덴 페스티벌의 성공 이후, 플럭서스 작가들은 암스텔담, 런던, 파리, 코펜하겐 등의 주요 도시로 ‘선교활동’을 벌여나갔다. 특히 1963년 뒤셀도르프의 미술학교에서 있었던 “페스텀 플럭소룸 플럭서스 / 음악과 반음악(Festum Fluxorum/ Musik, Antimusik)”은 독일에서 열린 가장 큰 규모의 전시였다. 크냅쉬타인은 뒤셀도르프 축제가 “교조화(敎條化)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갈등을 플럭서스의 기치 아래 통일시킬 수 있었던 최후의 대규모 이벤트”였다고 평가하고 있다.9) 이 행사는 마키우나스가 작성한 “선언문”을 관객들에게 뿌리는 것으로 막을 열었는데, 그것은 “부르조와 세계의 구역질나고, ‘지식인 연하는’, 전문가적이고 상업적인 문화를 정화하라”로 시작하여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가들이 통일된 전선과 행동으로 가도록 그 심장부에 불을 당겨라”로 맺고 있다. 그러나 이 선언문의 명백한 정치적 성격은 참여한 다른 작가들을 다소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꿈꾸던 플럭서스의 방향은 이렇게 과격한 ‘파괴’가 아니라 기존체계에 대한 거부감을 수단으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창조’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도판3) 뒤셀도르프에는 비스바덴 페스티벌의 두 배에 가까운 작가들이 참여했고, 볼프 포스텔의 <크리넥스>, 조지 브레히트의 등 전형적인 플럭서스 작품들이 상당수 공연되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요셉 보이스의 <시베리안 심포니 1악장>(도판4)이다. 자작곡과 에릭 사티의 곡을 섞어가며 연주하다가 피아노 옆 칠판에 매달아놓은 죽은 토끼의 심장을 들어내고 다시 칠판에 무언가 철학적인 내용의 글을 쓰는 식으로 진행된 이 행위는 본질적으로 플럭서스의 전형적인 함축적이고 간결한 특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런 이유로, 마키우나스를 비롯한 다른 참여작가들은 이 작품이 지나치게 자의식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보이스의 개성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서로가 서로의 작품을 번갈아 자유롭게 공연하는 플럭서스의 ‘익명성’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또한, 마키우나스는 포스텔의 <크리넥스>작품조차 변화가 없다는 이유로 맹렬히 비난했다. 마키우나스의 ‘선언문’에서부터 징조를 보인 이같은 균열은 쉽사리 아물지 않았으며 결국 같은 해 마키우나스가 뉴욕으로 돌아간 뒤에는 한동안 독일 내에서의 플럭서스 활동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와중에도 토마스 쉬미트의 중개로 이루어진 아헨 공연, 베를린의 르네 블록 갤러리 공연, 그리고 1970년 쾰른 예술협회에서 열린 최초의 대규모 해프닝 & 플럭서스-전시회를 기념한 공연 등으로 독일내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후 플럭서스는 무게중심이 어느 정도 뉴욕으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펼쳐 매년 최소한 서너 차례, 많게는 10회가 넘는 공연을 지속적으로 가졌다. 그러나 공연들 대다수가 초기공연들처럼 여러 작가들의 공동작업 형식보다는 개인적인 소규모의 공연들에 그쳤다. 반면에 1982년 비스바덴에서 다시 모인 20주년 기념행사에는 40명, 1992년의 30주년 기념공연에는 60명이 넘는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존 케이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 주요 멤버들이 죽고 사라진 자리를 제 2, 제 3세대의 젊은 ‘플럭서스’ 작가들이 대신했다. 이처럼 특정 작가들의 소유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 현상이야말로 플럭서스가 문자 그대로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고 본질적으로 열려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Ⅳ. 플럭서스 오브제 플럭서스 오브제들은 ‘출판’이라는 형식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애초에 플럭서스란 명칭부터가 마키우나스가 “예술, 비예술, 음악, 비음악, 문학, 비문학 등등을 위한 국제적인 잡지”의 제목으로 생각해 두었던 것이었고, 심지어 마키우나스가 주도했던 초기의 플럭서스 공연들도 궁극적으로는 이 잡지를 선전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었다.10) 결국 이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그 지향(指向)만은 플럭서스 작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플럭서스의 첫 출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선집(An Anthology)”은 결국 마키우나스가 구상했던 잡지와 유사한 내용으로 등장했다. 이 책은 라 몬테 영과 잭슨 맥 로우가 편집을 맡고 마키우나스가 디자인하였는데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26인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작품과 악보 등을 게재하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장래의 플럭서스 멤버들도 기고했으나, 출판이 지연되어 1963년에야 빛을 보았다. 이밖에도 1964년 딕 히긴스가 “섬싱 엘스 프레스(Someting Else Press)”라는 출판사를 차리고 자신의 작품 , <제퍼슨의 생일>등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일이나, 조지 브레히트가 1963년부터 실질적인 플럭서스 기관지 역할을 했던 “cc V TRE”라는 일종의 신문을 발간한 것도 이런 일관된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11) 이렇게 출판을 중시하는 경향은 에멋 윌리엄즈나 마키우나스 자신처럼 구체시(具體詩)에서 출발한 작가들이 플럭서스에 존재했다는 점에서도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이런 출판 행위가 결국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가장 광범위하고 또 민주적으로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오브제들 상당수가 이런 출판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1965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출판물, 오브제 그리고 여러 잡다한 플럭서스 ‘상품’이 디자인되고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 시리즈가 제작되었고, 출판물 작품집이랄 수 있는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 (도판5)은 편지와 소포 등을 통해 수집한 개별 작가들의 다양한 오브제, 신문, 출판물, 영화 등을 서류가방에 넣은 것으로서 뒤샹의 <여행용 가방 (Boite-en-Valise, 1938-41)>의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마키우나스는 다양한 오브제와 출판물들을 판매하기 위해 1964년에서 66년까지 뉴욕 커낼 가에 실제로 “플럭스샵(Fluxshop)”을 몇 군데 열기도 했지만 첫 해에는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속적으로 유럽에까지 이 판매활동을 확대시켜 나갔다. 판매에 대한 마키우나스의 집착은 그 자체가 당시 플럭서스 작가들의 대중적 지향점을 보여주는 듯 하여 흥미롭다. 결국 작가들이 출판물을 만들어낸 것은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들을 관객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남준 역시 1978년 기존예술의 관행을 비판하며 쓴 글에서 ‘예술의 공유와 분배가 비전문적인, 비엘리트적인 것이어서 관객이 만족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예술이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백남준 역시 마키우나스가 주장한 플럭서스 출판물의 기본원칙, 즉 권위적인 예술문화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매체의 틀에서 벗어나 예술과 삶이 화해하여야 하며, 그 결과물은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유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근본적으로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특징은 플럭서스 오브제들 중 상당수는 행위작업의 결과물, 즉 일종의 다큐멘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기록의 성격을 넘어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백남준의 <머리를 위한 선(禪)>은 라몬테 영의 악보중 “직선을 긋고 그것에 따르시오”라는 문구를 재해석한 것인데, 그는 자신의 머리, 손, 넥타이를 잉크와 토마토 주스가 들어있는 그릇에 담근 후 긴 종이를 따라 기어갔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작곡에서 시작되어 퍼포먼스의 형태로 발전되었고, 오브제인지 퍼포먼스인지, 또 영의 작품인지 백의 작품인지 판단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지경에 이른다. 또한 존 케이지의 <모차르트 믹스>(도판6)는 케이지 특유의 타이포그래피와 함께 모차르트의 음악이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와 카세트를 한 박스에 넣은 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여러 곡을 한꺼번에 연주할 수도 있고 한 곡씩 따로 감상할 수도 있다. 즉, ‘음악의 시각화, 시각의 음악화’라는 플럭서스의 ‘인터미디어’적인 특성과 오브제를 통한 관객과의 상호소통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조 존스의 기묘한 ‘음악기계’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는 1976년 베를린 미술학교에서 마키우나스와 브레히트, 조 존스, 백남준, 아이요, 와츠 등이 구성한 <플럭서스 미궁(Flux-Labyrinth)>(도판7)을 들 수 있다. 전시공간 안에 복잡하게 설치된 미궁 속으로 관객들을 지나가도록 하고, 각각의 구역에는 작가들이 각기 고안한 일종의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관객들은 통로 밑으로 기어가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라기도 하면서 이 작품을 총체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미 오브제, 공연, 작가와 관객 등의 경계는 극도로 모호해져 버린다. 이상의 예들은 플럭서스 오브제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과 예술작품의 역할, 행위와 오브제의 관계, 예술과 삶의 관계, 그리고 예술작품이 만들어지고 제시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 전반에 대한 해학적인 반론을 제기하고자 하는 플럭서스 작가들이 우리에게 내미는 초대의 손길인 것이다. Ⅴ. 플럭서스의 특성 “플럭서스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은 그 자체로 플럭서스의 다양성과 한정하기 어려운 넓이를 짐작하게 한다. 르네 블록은 1982년 플럭서스 20주년 기념전시를 기해 열린 토론회에서 논의된 플럭서스의 정의에 대해 “작가들 수만큼이나 많은 대답과 그럴 듯한 설명들이 나왔지만.....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회고한다.12) 또, “결코 명쾌한 답을 할 수 없다... 플럭서스에는 일정한 양식이 없으며 차라리 일종의 정신적인 태도였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13) 또한, 이번 전시의 최초기획자의 한 사람인 가브리엘 크냅쉬타인 역시 “독일에서의 플럭서스의 역사 역시 이 예술운동의 비통일적이고 다면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4) 결국 “플럭서스와 독일 1962-1994” 역시 그 질문에 대한 또 다른 해법을 찾는 노력의 일환이겠지만, 지역적 한계를 설정하여 폭을 좁혀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수수께끼와 같은 속내를 명쾌히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주요 플럭서스 작가였던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는 “우리는 플럭서스에 대해 각각 다른 생각을 가졌었다. 나에게 플럭서스는 서로 친밀했으며, 서로의 작업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사람들의 집단이었다”고 회고했다.15) 자연히 이들의 작업은 동료에게서 얻은 자극을 또 다른 형태로 변화시키고 이것이 다시 새로운 자극이 되는 식으로, 의도적으로 특정한 목표점을 설정하지 않은 채 끊임없는 변화와 흐름16) 에 그저 맡겨두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심지어 주요 플럭서스 작가중 한 사람인 에릭 앤더슨(Eric Anderson)은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위해 보낸 성명서를 통해 “퍽서스(FUXUS)은 심지어 바르게 쓰여질 수조차 없다”고 재치있게 강변하기도 했다.17) 그렇다면 어쩌면 “fluxus(흐르는, 변화하는)”라는 라틴어 명칭의 뜻 그대로 그저 흘러가게 놓아두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플럭서스 작가와 작품들은 분명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다양한 양상들로부터 일정 부분의 공통점과 속성을 추출해 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특히, 일견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하게 구성된 이번 전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윤곽을 파악하는 것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참고할 만한 기존의 정의로는 플럭서스의 주요 작가의 한 사람인 딕 히긴스(Dick Higins)가 자신의 저서 <플럭서스: 그 이론과 수용>에서 열거한 9가지 기준, 이를 수정·보완한 켄 프리드만의 12기준, 그리고 지난 서울 페스티벌과 관련하여 김홍희 교수가 새롭게 정리한 9가지 기준 등이 있다.18) 여기서는 편의상 보다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네 가지 범주 정도로 구분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이번 전시에 선행하여 대략적인 속성을 감지하고자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1) 탈장르 - 인터미디어, 시간성, 삶과 예술의 통합 2) 탈개인 - 놀이정신, 우연성, 작가주의의 지양 3) 탈국가 - 세계주의 4) 탈관념 - 우상파괴주의, 혁신주의, 실험주의, 놀이 ㅇ 탈장르 플럭서스의 ‘탈장르’적인 속성은 기본적으로 이들 작가들의 자유로운 보헤미아적인 특성에 근거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들 참여작가들이 극히 다양한 영역으로부터 즉,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출발하였다는 사실에서도 기인된다. 음악에서 출발하여 시각적인 영역으로 확장한 백남준, 딕 히긴스, 라 몬테 영, 조 존스, 벤쟈민 패터슨, 잭슨 맥 로우 등과 미술에서 출발한 요셉 보이스, 볼프 포스텔, 알리슨 노울즈, 밀란 크니작, 시(詩)로부터 시작한 에멋 윌리엄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왕성한 추진력으로 플럭서스를 조직적인 국면으로 이끌어간 조지 마키우나스가 건축과 디자인, 음악학, 미술사 등을 두루 섭렵한 인물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같은 다양한 작가들간의 긴밀한 결합은 자연히 장르를 넘어서는 결과로 이어졌다. 딕 히긴스는 이같은 경향을 “인터미디어(intermedia)”라는 신조어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같은 성향은 결국 모든 기존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궁극적으로 삶과 예술의 경계마저 초월하고자 하는 의식으로 발전되었다. ㅇ 탈개인 - 놀이정신, 우연성, 작가주의의 지양 매츄너스는 1962년 슈미트와 볼프 포스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플럭서스는 예술이 단지 예술가의 자아를 위한 매체이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집단적인 정신 하에 익명성을 가지고 반개인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19) 이같은 플럭서스 본연의 대중성을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머’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플럭서스 퍼포먼스는 앨런 캐프로우 식의 복잡하고 자기 표현적인 성격의 ‘해프닝’과 분명히 구별된다.20) 플럭서스 작가들은 현대미술에 있어서 작가의 아우라를 은근히 부각시키는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속성을 거부했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플럭서스 작가들의 독특한 ‘서민(庶民)’적인 취향과 공동작업의 취향과 함께 전후 국제적인 미술흐름의 주류를 이루며 점차 귀족화되어가던 추상표현주의, 앙포르멜 등 소위 추상미술의 전횡에 대한 반발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서명도 하지 않은 작가들의 에디션을 함께 모아서 ‘출판’하는 소위 플럭서스 멀티플이나 서로가 서로의 작품의 자유롭게 공연하고 또 원작자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최소화하여 공연자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재창조하는 방식의 플럭서스 행위작업 등은 이런 성향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아울러 다다이즘에서 출발하여 존 케이지의 ‘무결정성 미학’에까지 이르는 소위 “우연성”의 강조 역시 작가주의에 대한 플럭서스 작가들의 반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 선배들의 작업이 제작과정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차원이었다면, 플럭서스 작가들은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확장하여 관객과의 즉흥적인 교류와 예기치 못한 효과까지 작품속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작품의 제작과 제시 양자 모두에서 우연성의 원칙에 입각한 놀이판으로 전환시킨다. 공연장에 나비가 날도록 하여 그 가상의 날개짓 소리를 작곡으로 전환한 라 몬테 영의 <나비 작품>(도판8)등이나 바이올린을 천천히 집어들었다 내려쳐 부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백남준의 (도판8)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렇게 작품이 어느 특정 작가의 소유물로부터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전환됨으로써 진정한 창작의 민주화, 예술과 삶의 전환이 실현되는 것이다. ㅇ 탈국가- 세계주의 플럭서스는 처음부터 여러 나라로부터 모여든 작가들의 긴밀한 상호관계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독일과 뉴욕을 중심축으로 하여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 등의 유럽국가들에서 한국, 일본 등의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배경과 국적의 작가들이 한 데 어우러지는 용광로였다. 그러나 플럭서스의 세계주의는 단지 참여작가들의 국적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기존의 국가개념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의 반국가주의, 유럽문명을 비판하는 반유럽중심주의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21) 특히, 독일지역에서 일어난 플럭서스에 있어서 이같은 탈국가주의는 패전 후 독일의 사회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하네스 클래더스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독일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했고... 이런 정체성의 혼란은 오히려 강력한 국제주의가 전개될 수 있는 결정적 요소들 중 하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결국 이같은 국제성의 강조는 천성적으로 보헤미아니즘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낸 플럭서스 작가들에게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당시 파리와 뉴욕을 중심으로 한 자국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도 상당히 작용하였다. 또한, “동시성”에 대한 강조에 있어서도, 이런 국제성은 유리한 기반을 제공했다. 즉,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실연되는 공연과 공연자들 간에 일종의 유대감(인연과 유사한?)의 강조라는 맥락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같은 국제성의 강조는 결과적으로 백남준, 아이요, 다카하시 시게오 등의 아시아 출신의 작가들이 전혀 거리낌없이 첨단의 예술실험에 동참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ㅇ 탈관념 “플럭서스는 모든 기존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마키우나스의 강령에서 볼 수 있듯, 플럭서스는 처음부터 다다이즘의 기성 관념과 체계에 대한 거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마키우나스의 첫 강연의 제목이 “미국에서의 네오 다다”였으며, 백남준과 함께 한 첫 공연의 제목이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플럭서스의 거부감은 다다이즘 식의 무조건적인 거부나 무정부적인 파괴의 제스쳐가 아니었다. 여러 참여작가들이 공히 주장하고 있듯, 이들의 지향점은 파괴 자체가 아닌 이를 통한 새로운 창조였다. 또한 마키우나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체제의 붕괴나 정치적인 언급과 관련되는 것을 극히 조심하였다. 예를 들어, 존 코너의 <피아노 작품> - 한 대의 피아노를 철저히 분해해 버리는- 은 당시 사회로부터 순수음악이나 더 나아가 부르조와 사회의 취미에 대한 비판과 조롱으로 해석되면서 분노를 자아내었다. 그러나 이들이 의도한 것은 단순한 냉소가 아니라 피아노의 분해과정에서 생겨나는 소음까지 음악으로 아우르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플럭서스의 탈관념은 부정이 아닌 긍정의 미학이었던 것이다. Ⅵ. 남겨진 의미 플럭서스. 그것은 무엇보다 만남, 이벤트, 아이디어, 오브제들로 구성되어 오랜 시간 동안 전 세계로 뻗어나간 다차원적 네트워크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모든 관습과 구분을 초월한 “전영역적 현상(ein Feld-Ph nomen)”이었으며, 수많은 매듭들을 통해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확장시켜간 거대한 그물망이었다. 그리고 그 주요한 매듭점이었던 작가들이 상당수 타계한 상황에서도 이 그물이 여전히 생명력과 탄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플럭서스’가 단지 특정 작가들의 예술세계를 뛰어넘어 진정으로 삶과 예술을 한 데 엮고자 했던 시도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전문가주의를 부정했던 플럭서스 역시 다른 아방가르드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미술관에 ‘소장’되는 운명에 놓여있다. 다만 이 전시가 그저 역사적인 차원에서의 정리 수준을 넘어서 관객들에게 삶과 예술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인가 만이 심판대에 서 있다. ‘예술 속의 삶, 삶 속의 예술’을 부르짖은 못 말리는 악동들의 진지한 장난들을 통해 이어져 온 “매듭 많은 긴 이야기(eine lange Geschichte mit vielen Knoten)”를 우리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 보도록 하자. 그 복잡하게 꼬인 매듭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삶과 예술의 의미와 가능성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또한 이들 작가들이 우리를 초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주 석 1) 르네 블록, “우리들의 플럭서스 영혼”, 『플럭서스』 (김홍희 편저), 도서출판 AP 인터네셔널 서울, p. 14 2) Block, Rene , “Fluxus Music: An Everyday Event”, Fluxus in Germany 1962-1994, p. 30 3) 이 시기에, 유럽 다른 지역보다 유독 독일에서 플럭서스가 먼저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클래더스의 대담을 참고할 것. 그는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문화적·정신적 공허감, 뒤늦게 출발한 미술시장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당시 독일의 현대미술에 대한 왕성한 수용의지를 주요요인으로 꼽고 있다. 4) 물론, 여기에는 ‘플럭서스’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된 행사라는 점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5) Cladders, Johannes, “Every Communication is a Collage”, 앞의 책 p. 6, 가브리엘 크냅쉬타인과의 대담 중에서 6) 그러나 마츄너스와 요셉보이스 간의 불편한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1963년 “죽은 토끼에게...” 퍼포먼스 이후, 마츄너스는 보이스의 주제가 플럭서스의 원칙에 비해 지나치게 무겁다고 그를 이후의 공식 프로그램에서 제외시킨 바 있다. 7) 특히, ‘간결성’의 미학은 존 케이지로부터 영향받은 선(禪) 사상의 영향이 컸다. 즉, 결과적인 효과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시간과 에너지, 재료가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토마스 쉬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플럭서스에서 내가 배운 것은 다음과 같다 : 조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건물로 세울 필요가 없고, 그림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을 조각으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스케치로 끝낼 수 있는 것은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 종이쪽지에 간단히 메모할 수 있는 것은 스케치할 필요가 없으며, 머리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메모지도 필요없다! 이렇게 많은 작고 단순하고 간결한 작품들이 플럭서스에 존재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8) Block, Rene, 앞의 글, p. 30 9) Conzen, Ina, “From Manager of the Avant-garde to Fluxus Conductor: George Maciunas in Germany”, 앞의 책, p. 26 10) 마키우나스가 뉴욕에서 AG화랑을 경영하고 있었을 때 기획한 <뮤지카 앤티카 에 노바>공연 초청장에는 심지어 “입장료 3불은 ‘플럭서스’ 잡지 발행을 위해 쓰일 것”이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김홍희, “플럭서스 이야기”, 앞의 책 p.60 참조) 11) “V TRE”라는 제목은 브레히트가 우연히 발견한 타다 남은 네온사인에서 선택한 것인데, 소문자 “cc”가 붙은 것은 1964년 마키우나스를 만난 후부터이다. “c”는 마키우나스의 독특한 상징체계에서 브레히트를 가리키고, 이를 두 번 쓴 것은 이 신문이 <워터 얌 박스 (Water Yam Box)>에 이은 브레히트의 두 번째 출판물이라는 뜻이다. (앞의 글, p. 82 참조) 12) Block, Rene, “Fluxus Music : An Everyday Event”, 앞의 책, p.30 13) Block, Rene, “1962 비스바덴 플럭서스”, 1982 14) Knapstein, Gabrielle, “Every Communication is a Collage”, Fluxus in Germany 1962-1994, p. 6, 요하네스 클래더스와의 인터뷰 중. 15) Smith, Owen F., “Fluxus: A Brief History and Other Fictions”, In the Spirit of Fluxus, Armstrong, Elizabeth & Joan Rothfuss ed. Minaepolis: Walker Art Center, 1993, p.24에서 재인용 16) ‘fluxus’의 사전적인 정의는 “흐르는 행위: 계속되는 움직임 또는 지나가는, 흐르는 시내처럼; 계속되는 변화의 연속”이다. 17) 김홍희 편저, 『플럭서스』, 도서출판 AP 인터내셔널, 서울, 1993. p.79 18) 앞의 책, pp. 70-75 참조 19) Tisdall, Caroline, Josep Beuys, NY: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1979, p.84 20) 캐프로우는 플럭서스에 대해 경멸조로 ‘goofing off(바보짓)’이라고 조롱했으나, 플럭서스 작가들은 오히려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Armstrong & Rothfuss ed. p.72) 21) 김홍희, “플럭서스 이야기”, 『플럭서스』 p. 70 참조 |
(도판1) 비스바덴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벌” (1962년 9월1일-9월23일)의 포스터 |
(도판2) 비스바덴 페스티벌 중 필립 코너의 <피아노 작품>을 공연중인 마키우나스, 히긴스, 포스텔 패터슨, 애멋 윌리엄즈 |
(도판3) 조지 마키우나스, <선언문 Manifesto>, 1963 |
(도판4) <시베리안 심포니 1악장>을 공연중인 요셉 보이스, 뒤셀도르프 미술학교, 1963 | (도판5) 조지 마키우나스/출판, <플럭서스 키트 Fluxkit>, 1964, 12x43x33cm, 여러 플럭서스 작가들의 작품을 마키우나스가 모아서 제작 | (도판6) 존 케이지, <모짜르트 믹스 Mozart Mix>,1991, 10x86x81cm,녹음기, 종이, 나무 등 |
(도판7) 1976년 베를린의 “플럭서스 미궁” 전시 중 <마키우나스의 문> 부분 | (도판8) 를 공연중인 백남준 1962, 뒤셀도르프 카머스필 |
'Art 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와인에서 39년 함께 산 남편 냄새가"...관객 입 터지는 '이 공연' (0) | 2024.04.14 |
---|---|
들뢰즈, 감각의 논리, 베이컨, 아플라 (0) | 2024.04.12 |
김범 (1) | 2023.12.03 |
펠든크라이스, 소마앤바디, 소마틱 (1) | 2023.11.13 |
히토 슈타이얼 : 데이터 사회를 해부하다 (0) | 2023.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