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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View...행간 3...주물, ‘여성.어머니가 갖는 남근의 대체물, 아이는 이를 믿고 그를 포기하려 하지 않아’, 자신이 감지한 또렷한 현실을 부인하며, 퇴폐적인 것의 수용을 통해 현실 인식하고..

2. 오드라덱의 세계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ellenus&logNo=40191409569#:~:text=%EC%98%A4%EB%93%9C%EB%9D%BC%EB%8D%B1%EC%9D%80%20%EC%95%84%EB%AC%B4%EB%9F%B0%20%EB%AA%A9%ED%91%9C,%EC%A1%B4%EC%9E%AC%2C%20%EA%B7%B8%EA%B2%83%EC%9D%B4%20%EC%98%A4%EB%93%9C%EB%9D%BC%EB%8D%B1%EC%9D%B4%EB%8B%A4.]

 

2.1. 프로이트 혹은 부재하는 대상

 

1927, 국제정신분석연구, 프로이트의 주물, 짧은기사, ‘대상의 선택이 하나의 주물에 의해 지배받는',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의 모든 증상들이 하나의 설명으로 축약된다고 결론, 페티시스트의 고정관념은 남자아이가 여자.어머니에게 남근 없다는 것 발견하고, 이에 대해 의식자체 거부하며 발생, 현실부인, 자신의 남근 제거위협 느끼기 때문, 주물은, ‘여성.어머니가 갖는 남근의 대체물, 아이는 이를 믿고 그를 포기하려하지 않아’

 

본질적으로 모호하다고, 유령 포기하도록 하는 현실감각과 현실감각을 포기하도록 하는 반항적 욕망 사이의 분쟁 속, 아이는 어쩔 줄 몰라하거나, 두 가지 모두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며 무의식 속에서만 가능한 타협지에 도달,

특별한 메커니즘에 따라 자신이 감지한 또렷한 현실을 부인하며, 퇴폐적인 것의 수용을 통해 현실 인식하고 현실의 고통 수용,

 

하여 주물은 육체의 일부와 연관되든 무기적 사물과 연관되든, 어머니의 남근이라는 무의 시체이며, 그 부재의 기호, 무언가의 상징이며 부정을 상징하는 주물,

본질적으로 하나의 분열 속에서 명맥 유지, 그 속의 역반응이 본격적인 자아분열의 핵심 구축

 

페티시즘적인 유형의 사고방식이 가장 일반적인 수사법 중 하나인 제유,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

부분이 전체를 감당하도록 하는 제유의 대체방식은 페티시즘 속 섹스파트너의 몸의 일부가 몸 전체를 대체하는 방식과 일치,

한 용어는 다른 용어를 대체하며 그를 부정하며 또 불러일으켜, 이런 부정적언급,으로 발생하는 것이

대체된 말,이 갖는 특별하고 시적인 이력, 과정의 모호함은 프로이트의 부정이 갖는 모호함과 유사해, 이런 페티시즘적 성격은 하나의 독특한 환유과정,

[대유, 제유,환유, 인유,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obero338&logNo=221441603418]

 

즉 바사리와 콘디비가 미켈란젤로의, 만들다가 만, 조각에 대해 최초의 비평적 고찰 시도한 이후 근대 예술의 중요한 양식적개념이 된 미완성,속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나, 미완성작품에 대한 전기낭만주의적 취향 극단으로 발전시켜, 팔라디오의 빌라들을 절반정도만 부순 뒤 인공유적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길핀,

 

천재의 간결, 명료함,이 바로 전체,를 가리킬 수 있는 부분을 제시하는데 있다는 것 깨달고 있어, 슐레겔은, ‘고대인들의 많은 작품들이 파편으로 화한 반면, 현대인들의 작품들은 처음부터 파편으로 탄생한다’,는 명언 남겨,

 

노발리스 처럼, 완성작품은 모두 필연적 한계 가져, 그를 넘어서는 것은 오로지 파편작인 작품 뿐이라 믿어, 이런 관점에서 말라르메 이후 현대시들은 무언가.절대시,의 참조로 파편적,

무언가,의 모습은 드러날 수 없고 그 부정을 통해서만 현시,

 

평범한 언어적 환유와 차이가 있다면

대치를 통해 밀려난 대상.파편이 관여하는 전체,가 어머니의 남근처럼,

존재하지 않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과 미완성,이 따라서 페티시즘적인 부정과 정확하고 완벽한 짝을 이룬다는 점

 

오르테가, 현대예술의, ‘가장 급진적 비인간화 도구라고 비관한 메타포’,에 대해서도 유사한 측면 발견,

메타포는 한 가지를 또 다른 것과 교체하지만,

후자에 도달 위해서가 아닌 전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임,

원래 명명될 수 없는 대상 부르기 위해 고안된 대체적 표현, 메타포와 페티시즘의 연관성은 환유의 경우보다 더 분명해,

페티시즘적 현상의 기원이 무의식에 있다는 사실 증명하는 것이 프로이트의 목적이었으니,

그가 유아기적 부정의 모호함이 대상-주물의 정황에 가져올 수 있는 결과에 대해 그다지 많은 신경쓰지 않았고,

대상과 주물의 관계에 대한 대상 재생산해내는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인간 문화와 관련지어 관찰할 생각 하지 못했음은 놀랍지 않아

 

주물, 하나의 붙잡을 수 없는 대상이 그런 존재방식 통해 인간의 필요 만족시킨다는 역설에 직면,

대상의 주물은 실재만큼 사실적.구체적이며 만질 수 있는 무엇임,

하지만 부재하는 것의 실재로서, 만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허상에 불과,

실제로는 소유할 수 없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게 만들어

 

주물의 본질적 모호함이 오히려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것,

페티시스트는 결국 주물 수집하고 그 수를 배가시켜,

퇴폐적 주체는 퇴폐적 욕망의 대상이 동일한 특징 보이면, 그 모양새와 무관하게 모든 대상에서 같은 만족감 얻어,

주물은 부재의 부정인 동시에 기호,

하여 복제불가능의 유일무이한 사물이 아니고, 반대로 무한한 대체 가능의 사물,

복제되는 대용품 중 어느 것도 주물이 상징하는 무,를 해소시키지 못해,

페티시스트가 주물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배가시키고, 그의 하렘을 대용물로 채워 넣어도,

주물은 숙명적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자신의 모습 드러낼 때마다 오로지 스스로의 신비로운 유령을 칭송할 뿐

주물은 그렇게 사물의, 인간이 창조한Facticia의 새롭고 무시무시한 존재방식으로 떠올라,

주물이 처음에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와 훨씬 더 친숙하다는 사실 깨달아

 

2.2. 마르크스 혹은 만국박람회

: 페티시즘 관련 프로이트 기사 발표 2년 전, 릴케는 비톨드 폰 훌레비츠에 보낸 편지,

사물들의 근본적 변화가 그에게 가져다 주는 두려움을 표현

 

우리의 할아버지들에게 집 한 채, 연못 하나도 미지의 탑과 입던 옷, 망토도 더 무한히 많은 것 의미,

친근감 가져, 선조들에게 모든 사물들이 일종의 항아리, 그 안에서 인간적인 것 발견하고 더 인간적인 것을 보전할 줄 알아,

 

하지만 이제 미국에서 건너오는 분간할 수 없는 텅 빈 물건들, 껍데기 같은, 삶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물건들이 우리 부추겨, 미국 취향의 집, 사과 그곳에서 자란 한 그루의 포도나무 같은 것들,

선조들의 희망과 명상이 깃들어 있는 집과 과일과 포도열매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 우리와 함께 했고 우리를 알고 있고 우리와 함께 산 사물들은 쇠퇴하지만 더 이상 대체될 수 없는 것들, 이런 것들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일지도

 

자본론, 14, 상품의 주물적 성격과 그 비밀,에서 마르크스가 다루는 것이 이런 변신,

즉 인간의 노동에 의한 생산품이,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사물들’,로 변신하고, ‘감각의 지배하에 있으며 동시에 그를 벗어나는 환영으로 탈바꿈하는 모습

 

마르크스, 노동에 의한 생산품이 상품으로서의 형태 취하면

신비로운 성격’,은 더 이상 사용가치만을 갖고 있지 않는 물품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의 본질적인 이중화에 의해 결정,

 

하지만 이 사용가치는 동시에 무언가 다른 것의 물질적 지주이고, 그 무언가는 스스로의 교환가치, 사용되는 물건이며 가치운반체란 이중적 형태를 갖고 있어,

상품은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자산, 하여 그를 구체적으로 향유한다는 것은 축적과 교환 통해서만 가능

 

마르크스, 상품의 주물적 성격,이라 부르는 것은 생산품의 양면성에 기초,

즉 상품은 인간 향해 경우에 따라 다른 얼굴 보이며 두 얼굴 동시에 보이지 않아, 하여

상품의 주물적 성격은 페티시즘의 퇴폐적 주물과 닮았다고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유사성 보유,

상품의 사용가치에 교환가치가 더해지는 것은 페티시즘 속 물건의 일반적 사용에 특별한 상징적 가치가 더해지는 것과 일치,

 

주물이 2개의 모순된 현실 보여주는 기호이기에, 페티시스트가 자신의 주물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상품의 소유자 역시 써야 할 물건으로서의 상품과 가치로서의 상품 결코 동시에 향유할 수 없을 것, 상품이 모습 드러내는 물리적 조건을 조작할 수 있어, 어쩌면 그를 파괴할 때까지 물리적으로 변형할 수도,

하지만 상품은 그렇게 사라지면서 다시 스스로의 초월성을 증명할 것

 

상품 주도의 사물의 주물화 또렷하게 일어나는 것,

벤야민, ‘주물-상품 향한 순례의 공간’,으로 정의내린 만국박람회 통해서, 1851년 하이드파크, 마르크스, 런던에, 그때 인상이 상품의 주물적 성격에 관한 고찰에 영향 미쳐,

상품관련 언급하던, ‘환영’,은 팩스턴경의 크리스털로 뒤덮힌 궁전프로젝트 선택한 기획자들의 의도 속 분명히 존재,

1876년 파리의 박람회 안내서는 상품 갖는 환상적 성격의 절대성 다시 강조,

대중은 상상을 깰 수 있는 거대한 크기의 무언가 필요, 생각이 산업이 이룩한 기적 앞에 놀라 멈춰야 할 필요 있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마법에 빠진 시선이지, 획일적 방식으로 분류된 유사한 물건들 아니야’,

 

상품이 바법에 걸린 물건으로 변한다는 것, 교환가치가 상품의 사용가치 이미 잠식함 의미, 예술작품의 전시공간까지 갖췄던 신비한 크리스털 궁전의 갤러리 속, 상품은 마법에 빠진 시선 통해서만 즐기도록 전시

 

하여 처음으로 박람회통해 소개되었던 환영은, 우리시대 슈퍼마켓, 광고세례 노출된 경험의 사람이면 누구든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 붙잡을 수 없는 것의 등장

 

2.3. 보들레르 혹은 절대상품

 

: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 보들레르, 3편의 기사, 상품이 예술작품 향해 던진 도전장의 새로움과 중요성을 간파

 

예술에 적용된 진보라는 현대적 개념에 관하여’,

이국적 상품전시가 지적인 방문객에 줄 수 있는 자극적 느낌 묘사, 상품이 관람자 요구의 새로운 관심 무엇인지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 보여줘,

 

보들레르 역시 2차산업혁명 초기 만국박람회에서 나타난 상품의 변화현상에서 자신의 시학에 필요한 감성적 배경과 상징적 요소 발견.

박람회가 보들레르 처럼 날카로운 시선 가진 인물에 보여준 커다란 변화는, 상품이 실질적인 사용단계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모두 소진되는 하나의 무고한 대상을 넘어,

마르크스가 12년 뒤 상품의 주물적 성격, 상품이 가진 형이상학적 섬세함과 신학적 재치,에 대해 말하며 암시할 두려울 정도의 모호한,성격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점.

상품이 소모품을 유용성이란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며, 예술작품과 구별시키던 경계, 즉 르네상스부터 예술가들이 장인과 수공업자의 작업에 대한 예술적 창조의 상대적 우월성 강조하며 열성적으로 구축했던 경계는 무너질 단계에 도달

 

이전 예술작품에 할당되던 가치를 상품에 부여 시작한 만국발감회의 마술, 앞에서

보들레르는 도전 수용하고 전투공간을 상품의 영역으로 가져가, 이국적 생산품이 보편적 아름다움의 한 본보기,라 말하며 은연중 인정한 듯 그는 상품화가 사물에 각인시키는 새로운 특징 인정. 그런 특징들이 예술세계에 숙명적으로 발휘할 매력도 인식,

 

하지만, 이런 요소들을 경제의 독재와 진보의 이데올로기에서 도려내고 싶어해,

상품들의 침략에 대항한 보들레르의 위대함은, 예술작품자체를 상품과 주물로 탈바꿈시켜 침략에 대응했다는 점,

작품 속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구별하고 예술에 부여되던 전통 권위에서 작품의 고유함 분리,

여기서 작품의 모든 실용적 해석에 대한 비판과 시가 시 외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는 주장 통해,

그의 집요함과 미적경험의 붙잡을 수 없는 성격에 대한 강렬한 주장과  아름다움을 일시적.침투불능의 계시로 보던 미학이론,

이때부터 작품 에워싸기 시작한 근접불가능성,이란 차가운 아우라에 상응하는 것이 교환가치가 상품에 새겨넣는 주물적 성격

 

하지만 보들레르의 본질적 혁명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분리를 예술작품을 통해 재생하는 것 너머, 가치의 형태가 사용가치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하나의 상품, 예, 상품의 주물화 과정이 상품 자체의 실체를 부정하는 단계까지 발전되는 하나의 절대적 상품을 창조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상호폐지관계에 놓인 상품, 즉 가치가 무용성에 기초하고 사용이 근접불가능성에 기초하는 상품은 더 이상 상품 아니야,

 

또 상품의 보다 본격적 폐지는 작품의 절대적 상품화와 일치, 예술작업의 중심에 쇼크의 경험 위치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 쇼크,란 사물이 그 사용가치를 부여하던 권위 상실한 경우, 사물에 전통적 인지도 보장하던 권위 상실의 경우, 상품이란 가면 뒤집어쓰며 스스로 실행하는 격리화의 가능성 의미,

 

예술이 산업화된 문명 속 살아남기 원하면 예술가가 쇼크의 기원이 되는 파괴,

즉 사용가치와 인지도의 파괴를 자산의 작품 통해 재생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렇게 자신의 작품 자체를 붙잡을 수 없는 것의 운반수단으로 만들고 그 붙잡을 수 없는 것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권위 창출해내는 데 성공 했을 것,

하지만 그는 전통이 보장하던 모든 것을 예술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 의미, 예술가들은 과거와 현재, 오래된 것과 새것의 관계를 견고히 하고 전통 유지 위해 사물과 그 영역을 구축해 왔지만,

이제 자기부정,을 생존의 가능성으로 만들기 위해 모두 포기해야. 낭만주의 시인들의 첨예상 예술적 경험들을 무의 자멸이라 정의했던 헤겔이 이미 이해하듯,

자멸은 예술이 모더니티에 지불해야하는 대가. 포우,에 관해 논하며, ‘근접불능의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시인이 아니야’, 창작의 경험을 최후의 혈투에 비유하며, ‘그곳에서 예술가는 패배의 순간이 오기 전 두려워 고함 질러

 

보들레르, 현대시의 아버지, 페티시스트였기에, 상품과의 정면대결에서 승리 가능했을지도,

스스로의 부정 통해 부재하는 것을 실재하도록 만드는 대상-주물의 기적적 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인간이 자신의 창작품에 맡길 수 있는 가장 원대한 임부를 예술에 부여할 엄두 내지 못했을지도, 그것은 비현실의 도용!

 

2.4. 보 브럼멜 혹은 비현실의 도용

 

: 1843년 그랑비유, ‘인생의 소소한 재앙들’, 화보집 출판,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현상의 초기 이미지 제공,

사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비양심적인 태도’, 물이 새지만 잠글 수 없는 수도꼭지, 뒤집어지는 우산, 벗을 수도 신을 수도 없는 부츠, 찢어지는 바지 등,

우연.단순 사고 차원 넘어, 인간과 사물간의 새로운 관계 발견, 익숙한 사물들의 무서운 변신 앞 인간의 불편함 표현, 사물들은 무고함 잃고 제멋대로, 인간에 대항하며 스스로의 소용성에서 탈출 시도, 인간적 감정과 의식 수용, 사람처럼 게으름 피우거나 불만 토로, 음탕한 태도까지

 

말테의 수기’, 떨어지는 뚜껑의 일화, 릴케,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는 사물들 속에서의 혼돈 가져와’,

유령적 음모가 무대에 오르며 표현되는 것이 상품화된 사물들에 대한 비양심적 태도, 장인들의 물건이 대량생산으로 변신하며 은연중 발생한 전락, 현대인이 사물 대하며 잃어가는 모습에서 발견, 사물의 타락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의 어설픔, 즉 사물들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

 

사물들에 대한 비양심적 태도 보이기 시작한 사회의 꿈의 인물이 댄디, 즉 불편함 모르는 남자, 영국에서 멋진 이름의 인물들과 기득권층이 보 브럼멜의 한마디에 쩔쩔맸던 것은 그들이 필요하다 느끼던 이론을 브럼멜이 손에 쥐었던 듯 보여서,

우아함과 과분함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댄디,가 자연스러움 상심한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은 사용가치.교환가치 넘는, 사물들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가능성, 댄디는 사물 구의 대속자, 우아함으로 사물들의 상품,이란 원제 말소시켜

그랑비유의 살아있는 사물들 두려워하며, 댄디즘,을 종교정도록 생각하던 보들레르도 이 부분에서 시인이 댄디,로부터, 무언가 배울 수 있다고 생각

[댄디, https://namu.wiki/w/%EB%8C%84%EB%94%94]

 

상품의 주물적 성격에 대한 마르크스 분석은, ‘유용하지 않은 사물은 가치 없어, 쓸모 없어지면 만들기 위한 노동력은 헛되이 쓰여졌을 뿐, 아무런 가치 없다’,는 생각 바탕,

, 하여 교환가치의 축적에 사용가치의 향유 대치시켜, 그의 자본주의 비판 전체는 교환가치의 추상적 면에 대항해 사용가치의 구체적.실질적 면 내세우며 이뤄져, 생산자체는 발전과정 속 교환가치 아닌 사용가치,만을 목표로,

하여 소모 위해 필요한 사용가치란 기준 넘어서야 사용가치로의 역할 멈추고 교환의 도구, 즉 상품이 된다’,

 

폐쇄경제체제 속 생산자와 물건의 경계는 단순.투명, ‘자본주의는 자본의 축적 아닌 향유가 그 동력 제공한다고 가정하는 순간 흔들려’, 그의 비판의 한계는 그가 실용주의 이데올로기, 사용가치의 향유가 인간이 사물과 유지하는 관계의 자연적.본래적 의미로 보는 이데올로기, 하여 사용가치와 더불어 교환가치의 축적 넘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 놓쳐

 

현대 인류학, 유용성 없는 사물은 무가치하다는 선입견과 그 토대의 사상, 즉 경제적 삶을 움직이는 심리적 동기는 실용성 원칙이란 사상 부정적으로 평가해, 고대 경제활동 연구로 인간의 모든 행위가 생산과 보전, 소모로 귀결될 수 없다는 사실, 게다가 고대인의 삶, 무언가 지배받고 있었다는 느낌, 비생산적 소비의 상실의 원칙이라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에 지배받는 느낌 존재

 

포틀래치와 탕진,의 예식 관한 모스의 연구,

물물교환이 아닌 증여가 교환의 원래 형태, 증여예식에서 값진 물건의 파괴에 이르는 행위들이 경제적 실용주의의 관점으로 설명 불능 증명, 오히려 그런 행위 바탕으로 고대인이 원하는 지위에 오르려 부를 포기.파괴해야 했다고 설명,

 

고대인이 선물하는 이유는 잃고 싶기 때문, 사물과의 관계는 실용적 아닌 희생번제의 원리로 성립, 원시사회, ‘사물’,이 쓰이기만 하는 물건 아닌, 어떤 힘, 생명체처럼 마나,를 갖고 종교적 영역에 뿌리 박혀 있음 보여, 사물이 원래의 신성한 종교적 차원에서 빠져나가는 곳, 그를 되돌리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증여와 희생번제, 이 필요는 고대에 보편적.지배적, 하여 원시문화 속 신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희생번제와 방기,에 대한 인간적 요구에 틀 마련 위해서라 주장

 

보들레르, ‘여행가들이 북아메리카 숲 속에서 만난 어떤 댄디’,에 말하며 염두에 둔 점도 이런 행위였을 지도,

사용가치로의 회귀를 통해 상품 세계가 간단히 폐지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 ‘혐오스러운 유용성을 너무 미워하던 인물이었음,

댄디와 마찬가지로 보들레르에게도 활용적 차원에서의 향유,

상품화에서처럼 이미 껄끄럽게 변한 사물과의 관계에 불과,

현대사에 남긴 교훈은, 상품 극복의 유일한 방법은 상품이 상품자체로 폐지되고 사물을 본연의 진실에 되돌려 줄 때까지 그 모순점들을 극단으로 몰고가는 것 뿐,

노예적 사용에 의해 타락하고 세속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희생번제가 신성한 세계로 돌려놓듯이,

사물은 시적정화를 통해 향유뿐 아닌 축적의 차원 벗어나 원래의 상태로 복원,

하여 보들레르는 시의 창작과 희생번제 사이에, 노래하는 자,와 희생하는 자, 사이에 유사성 있다고,

계획했던 희생의 이론’,이란 제목의 글은 비록 단상만 남았지만 그 흔적을 불꽃’,의 노트에서 발견 가능,

 

희생이 파괴 통해서만 성화에 성공하듯, 상품을 붙잡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일탈으로만,

즉 그의 인지가능성과 전통적권위의 파괴 통해서만 상품의 기만을 진실로 변화 가능,

이것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론의 의미, 이는 예술 자체 위한 예술의 향유 아니야, 예술에 의한 예술의 파괴 의미

 

댄디와 시인이 사물에 가져오는 구원, 미적계시가 완성되는 찰나에 사물들을 불러일으키며 실현,

하여 문화의 전달가능성이 용해되는 순간을 쇼크의 경험 속에서 재생하는 것은, 동일한 사물을 위한 의미와 가치’,의 가능한 마지막 원천 구축하는 것 의미,

교환가치의 자본주의적 축적과 사용가치의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이론적 향유에 대항하여,

댄디와 현대시는 비현실의 도용이란 사물들과의 새로운 관계 제시

 

이 희생이란 과제 수행 위해 예술가는 상실과 무소유의 원리를 극단적 결과로 몰고가야,

랭보의 계획 내포하는 감탄, ‘나는 타자다’,는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사물들의 구원은 사물이 된다는’, 조건 없이는 불가능.

작품이 절대적 상품 되기 위해 스스로 파괴하고 일탈시켜야 하듯, 예술가-댄디,는 또 다른 누군가 향해 팔을 뻗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야, 또 본질적으로 반인간적이고 비인간적 창조물 되어야

 

발자크, ‘우아한 삶에 관하여’,

인간은 댄디가 되면 침실의 가구로, 똑똑한 마네킹으로 변신한다’,고 기록.

바르베 도르빌리도 조지브럼멜 언급하며 같은 현상 관찰, ‘그는 하나의 사물의 자리에 올라’,

보들레르는 댄디즘을, ‘가장 엄격한 수도원규칙, 지체불능의 명령, 산중의 노인이 제자들에 내린 자살명령에 비교

 

창조활동과 창조자도 이 일탈의 과정에 포함, 현대시에 두드러진 요소로서의 창조과정,

이어서 그 작품과는 별개의 독립된 가치로 자리잡는 현상은 무엇보다, ‘사물화될 수 없는 것을 사물화하려는 시도로 봐야,

 

작품을 상품으로 만든 다음

예술가는 상품의 비인간적 가면으로 스스로의 얼굴 가리며 인간적인 것의 전통적 이미지 내던져,

비평가들이 비인간화에 대한 책임 물으며 현대예술 비난할 때 기억 못하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시대에도, 예술 지탱의 중력의 중심이 인간적인 것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

 

현대시가 새로운면 있다면,

그는 인간을 영광스러운 존재로 치켜세우며 사물로 전락시키는 세상 앞에서

발자크의 독설을 현대시가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며, 인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가면 벗겨낸다는 점,

인간만큼 인간을 닮지 않는 것은 없다’, 아폴리네르,

이 관점을 큐비즘 화가들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요약,

무엇보다 예술가들은 비인간적으로 변하기 원하는 인간들’, 보들레르의 반휴머니즘,

랭보의 영혼을 괴물처럼 만들려면’, 클라이스트의 허수아비와 로트레아몽의 그것은 사람이거나 돌이거나 나무’, 말라르메의 나는 저말로 분해되고 말았다’, 인간의 모습과 카펫 섞은 마티스의 아라베스크, ‘나의 갈망은 차라리 죽은 자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것’, 벤의 인간적인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엇다’, 몬탈레의 달팽이에 남은 진주모의 흔적’, 첼란의 메두사의 머리와 로솝’, 등 하나같이 동일한 요규 표현,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여전히 표현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다

현대시가 탐구대상을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방향은 더 이상 인간도 신도 없는 무서운 공간 향해, 외롭고 이해불능의 방식으로 원시인들의 우상처럼 고개 치켜드는 것, 신성하며 참혹하고, 매혹적이며 잔혹한 실체, 시체처럼 꼼짝 않는 몸과 보이지도, 붙잡을 수도 없는 생명체의 유동성을 동시에 갖는 실체,

 

주물이든, 그랄이든,

시는 하나의 계시와 상실의 공간으로 모습 드러내고, 말들의 모사 속으로 돌아와 용해되기를 계속해, 백여년 전에 맑은 정신의 신봉자들이 시에 맡겼던 일탈과 앎과 구원과 탈소유의 과제가 이뤄질 때 까지

 

2.5. 팽쿠크 부인 혹은 장난감 요정

 

: 주물,의 의미와 변천사 속 의미심장한 사실 감춰져,

미개한,문화의 이질적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 보이던, 너무 부조리해서 그와 싸워보려는 이성에 빌미도 제공 못해 보이던 것,이 먼저는 경제분야에서 대량생산 품목으로, 이어서 성생활의 은밀함 속에서 퇴폐한 욕망의 선택으로 되살아나.

 

19세기 말, 페티시즘의 확산, 사물들의 총체적 상품화와 발맞춰 진행, 과거 종교적 힘 소유의 사물들이 물품으로, 상품으로 변신하듯, 페티시즘의 확산은 노동 통해 만들어낸 주물,의 새로운 변신의 예고

 

하나의 사물이 주물의 영역에 영입되면, 사물을 적절한 용도에 배치시키는 규칙이 매번 위반됨을 의미,

드브로스, 물리적 사물을 신성한 것들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

마르크스, 사용가치의 위반,

비네와 프로이트, 욕망이 스스로의 대상으로부터 이탈하는 것 의미,

 

페티시즘의 변천사가 보여주는 것은 해방의 이론가들이 다룬 적 없는 억압의 장르,

즉 사물에 규칙을 강요하며 행해지는 억압을 암호화하는 규칙들의 체제.

하여 ready-made같은 경우처럼, 하나의 사물이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거나 보기 흉한 것으로 만드는 결과 초래,

 

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차원의 사물들 존재, 원래 특별한 목적 사용의 운명 갖고 태어나기에 모든 규칙에서 벗어나있는 듯 한 사물, 바로 장난감, 보들레르, 1853 4, 몽드리테레르,, ‘장난감이 주는 교훈’,이란 글, 어린시절 팽쿠크부인의 집에서의 경험 이야기

 

부인이 손을 붙잡고, 방 문 하나 열었을 때 장난감으로 꽉찬 방, 경험, 이후 비로드 옷과 모피 걸친 부인 상상하지 않고서는 장난감 요정처럼 나타났던 그 부인 떠올리지 않고는 가게에 전시된 장난감들도 쳐다보지 못하는 지경에

 

장난감의 이용과 남용 분류.평가의 계기를 마련해, 의자를 역마차로 바꾸는 아이들, 장난감을 박물관처럼 정돈해놓고 건드리지 않는 아이들, 또 영혼을 보고 싶어 흔들고 던지고 부수는 아이들도,

보들레르, 이런 아이들 보며 주목하는 것은 기쁨과 낙담이 뒤섞인 하나의 관계, 인간과 사물과의 모든 종류의 유대, 예술적창조의 기반 이루는 관계의 기준

 

아이들이 장난감과 페티시즘적 관계 유지의 사실은 인형에 대한 릴케의 고찰, 지극히 가깝고 감사의 마음 가득 담긴 사물에, ‘영혼이 없는 보조물, 텅빈 주머니’,로 인형 대립시켜

 

처럼 가짜음식으로 영향 보충, 음식 먹이려면 온몸 더럽혀, 잔뜩 부푼 몸, 물 한 방울 빨아들이지 못하는…,

인형은 형편없는 기억력 때문에 자존심 상하게 만들어, 인형과의 유대관계를 부분적으로 구축했던 무의식 속에서 증오가 분출되는 순간, 인형은 가면 벗고 한때 우리의 가장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쏟았던 존재가 이상하고 무시무시한 몸 덩어리였다는 것 보여줘, 익사한 사람처럼 물 위로 떠올라, 간직했던 사랑이란 감정의 파도 위 떠다녀, 첫 취향은 아무 희망 없는 곳에서 키우도록 내버려두는 우리는 참 독특한 존재

 

인형은 잡을 수 없는 먼 곳에, 끝없이 무의미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욕망과 환상이 기대하는 결코 소진되지 않을 대상, 단순한 인형의 존재 뛰어넘어.

릴케, 정통한 사물들의 사라짐에 대해,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표현해야 하는 시인의 과제에 대해 기록한 내용,

 

부재하는 동시에 존재하는 릴케의 인형, ‘상인의 손’, 사이에서 그 무게 잃고, 천사의 손, 사이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 사물의 기호,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걸친 하나의 표징처럼, 여기서 릴케의 어린 경험 뒤 잊히지 않는 무시무시한 좌절감의 기억이 인형의 위협적 성격에 투영되는 것 확인,

반면 인형이 마다 않고 제공하는 정보들이 가리키는 것은 릴케가 사물과의 관계에 대한 병적인 예민함으로 무의식적 상태에서 기록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변하는 사물들의 본질

 

장난감이 간단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물건이라면, 사물들의 세계 속 장난감이 처한 상황 역시 달리 설명,

아리에스, ‘앙시엥레짐 속에서의 유아와 가족의 삶’,의 책, 장난감과 어른들 위한 물품 구분의 경계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분명하지 않아, 18세기 유럽 성인들, 축소모형과 인형의 집, 독일 장난감, 이태리 작은 생활용품 구입, 19세기  실내 채우고, 오늘도 중산층 실내장식으로 애용되는 소품들은 뱅블로,란 이름으로 불려,

어른들 위한 장난감의 일부, 하지만 장난감 기원 추적하면 다른 사물들과 구별 불능의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아리에스, 인형이나 축소모형 수집하며 난관에, 발굴지역 대량의 소형 조각품들이나 이미지들이 거의 가정의례, 장례, 봉헌 등 종교의미지녀, 하여 순수 장난감과 구별 어려워

장난감처럼 보이는 것들은 본래 심각한 성격의 물건들, 죽으면 저세상 여행동안 지켜보려 무덤에 같이 묻어줘, 축소모형들, 경제적,이유로 대치된 것 아니야

 

팽쿠크부인의 방 속 보물들, 사물의 보다 근원적 상황, 즉 죽은 자들, 아이들, 페티시스트들이 귀중한 정보 제공해줄 근원적 상황의 지표,

위니콧, 유아가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초기 연구, 과도기적 대상,이라 부르는 사물들, 외부현실 속 먼저 식별하고 점유하는 사물들 밝혀,

이들이 차지하는 공간은, ‘곰인형과 엄지사이, 사물과의 실질적 관계와 구강성애 사이에 일어나는 경험의 영역’, 하여 내면적.주관적 영역도 아니고, 외부적.객관적 영역도 아니야,

위니콧, ‘환영의 영역에 속해, 환영의 잠재력,속에 자리잡는 것이 바로 유희 비롯한 문화적 경험, 문화와 유희의 공간은, 인간의 내부도 외부도 아닌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사실에서 구별되며, 개인이 살아가는 실질적인 현실세계에서도 구별되는 제3의 영역

 

페티시스트 및 아이들, 미개인들, 시인들은 이 심리적 언어 속 표현되는 위상학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19세기 모든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인문학, 그 탐구의 대상도 이 3의 영역’,

사물들은 우리 밖에 있지 않아, 사용과 교환 위한 중립적 대상처럼, 측량가능한 외부공간 아니야,

반대로 사물들은 우리에 근원적 공간 열어, 여기서 출발해야 외부공간에서의 측량과 경험 가능해,

즉 사물자체는 처음부터 우리의 세상에 존재하는 경험의 공간, topos outopos,속에서 유지되고 이해,

사물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은,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의 질문과 연결,

주물처럼, 장난감처럼,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어디에도 없어,

이들의 공간은 대상과 가깝과 인간과 멀리 떨어진,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개성적이지도, 비개성적이지도 않고

물질적이지도 비물질적이지도 않은,

외관상 단순해 보이는 인간,과 사물,이란 미지의 세계로 느닷없이 등장하는 공간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