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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s 도서 리뷰549. 행간, "에로스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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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 행간, "에로스의 유령"

행간 작가 조르조 아감벤 출판 자음과모음 발매 2015.06.16. 에로스의 유령 조르조 아감벤,『행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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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유령

조르조 아감벤,행간

 

 

 

중세의 나태와 우울증: 욕망의 단념

 

 

그리스도교에서 나태는 7대 죄악에 들어가는데, 사람들은 단순히 생각하기에는 농경사회라는 노동지향형 사회 속에서 노동을 게을리 하는 것을 악덕을 치부하기 위한 문화적 맥락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독해를 하는 우리가 자본주의적 맥락에 놓여있다는 점에서도, 자본주의 역시 노동을 기초로 성립하는 사회이기에 무의식 중에 나태함을 죄로 받아들인다고도 볼 수 있죠실제로 가만히 있는 게 이렇게나 큰 죄책감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시대는 현대가 유일무이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조르조 아감벤은 실제로 나태를 죄악으로 규정했던 중세시대의 문헌학적 작업을 통해, 저 나태라는 것에 대한 중세인이 이해한 방식과 현대인의 이해한 방식 간의 다름이 있음을 밝혀냅니다.

 

가령 교부들이 관찰한 내용을신학대전Summa theologica속에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는 나태를 인간본연이 지니고 있는 영적인 자산 앞에서의 슬픔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니까 노동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문제로 바라본 것인데어쩌면 이는 중세시대라는 점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관점이기도 한데나태는 정확히 말해 신 앞에 선 인간이 그에 대한 의무로부터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는 현기증 나는 후퇴recessus를 의미합니다.

 

1 이는 신의 뜻이 옳고 그름을 인간이 인지하는 문제가 아니라, 설사 그것이 옳다손 인식한다하더라도 과연 인간이 그 길을 걸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세인들에게 나태는 그러한 길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느껴지는 영적인 태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신성한 선, bono divino 앞에서의 후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영적 가능성 앞에서의 후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어쨌거나 하나의 기본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중세 심리학이 이루어낸 가장 놀라운 성과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모순의 발견이다. 

나태한 인간이 신의 섭리 앞에서 후퇴한다는 것은 사실 그가 신의 섭리를 잊어버린다거나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그에게 부족한 것이 구원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면,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나태한 인간의 후퇴가 결국 드러내는 것은 욕망의 사라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접근하기가 점점 불가능해지는 욕망의 대상이다. 나태한 인간의 타락은 대상은 원하면서도 그것에 이르는 길은 원하지 않는 욕망의 타락이다. 그는 욕망하면서도 욕망의 성취를 위한 길을 가로막는다.2」

 

따라서 나태라는 것은 신앙적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음에 대한 절망과 우울에서 비롯되는 행동양태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는 신앙이 틀렸다는 신성모독이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길을 걸아갈 수 없다는 신학적 주체의 역량부족을 시인한데서 비롯되는 자학적 감정에 가까웠지요. 중세의 베네딕투스 수도사이자 신학자인 파스카시오 라드베르토Pascasio Radberto <절망을 절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길을 걷기 위한 신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desperatio dicta est, eo quod desit illi pes in via, quae Christus est, gradiendi).>라고 말한 맥락도 이와 같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봤을 땐 이러한 의지박약을 합리화하려는 데서 신성모독적 논리들이 나올 수 있으니수도원 사회 내에서 가장 높은 죄악으로 봤던 것이 오만과 나태였다는 점은 당연한 귀결이었지요.3

 

이런 점에서 나태와 단순한 게으름은, 적어도 중세에서는 날카롭게 구분되었습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게으름을 나태로 이해하지만, 중세에서는 근접할 수 없는 욕망과 소통하고자 하는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이해되었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나태가 그것을 행함으로써 역으로 자신이 욕망을 포기했다는 것을 매번 증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한 모순이죠. 어떤 일이 안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 않고 나태를 부리며 결단을 유보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포기된 욕망을 의식하며 슬픔을 느끼는 상태…… 

 

중세인들에게 나태는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욕망을 하려는 자기도착적이라 여겨졌습니다.「나태의 욕망은 근접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태는 대상으로부터의 도주일 뿐 아니라 대상을 향한 도주이기도 하다. 나태는 부정과 결핍의 언어로만 욕망의 대상과 소통한다.4」

 

그리고 나태가 욕망의 단념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울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나태가 내포한 모순성과 우울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백을 거절당한 남자의 심리를 살펴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고백을 거절당한 그에게 그녀라는 대상은 도달이 불가능하게 된, 그러니까 단념을 강요하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그는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쉽게 잊지 못합니다. 하는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활력이 깃들지도 않습니다—만사가 귀찮고 하찮게 느껴집니다. 깊은 우울이 깃든 일상의 부분 하나하나에서 그녀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찾아가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도저히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남은 길은 단념뿐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렸거든요. 

마치 라디오헤드 <creep>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처럼 스스로가 천사 같은 그녀에 비해 보잘것없음을 절규하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But i'm a creep. I'm a weirdo……」그래서 그녀를 찾아가지 않는데, 모순적이게도 그러한 외면 자체가 이미 그녀를 의식한 상태에서 벌어진 것이기에 그녀의 잔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옥입니다. 그는 그녀를 잊음으로써 기억합니다.

 

 

정신분석이 이해한 우울증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중세의학에선 우울증을 성적인 질병의 하나로 간주하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우울을 점성술에서 이해하는 방식을 가져와 사투르노적 기질(사투르노는 토성을 상징)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이해했는데, 훗날 이는 학자들에 의해 성적인 방종과 같은 요소가 빠지면서 지적고뇌에서 비롯된 회의적 우울로 탈색되게 됩니다. 이는 신학적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인간이 신의 뜻을 따르는 어려움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되었던 것에 기인하는데, 간단히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우울의 정서를 종래에 있던 성적인 이미지로부터 해방시켜야만 했던 것이지요.

 

신학자들이 우울증을 지적고뇌의 고통으로 승화시킨 것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왜 민간의학에서는 우울증을 성적인 무엇과 연결시켜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는 애초부터 우울증이라는 게 욕망의 단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기인합니다. 

대개 욕망의 대상은 사랑하는 이성인 경우가 많은데가령 상사병(相思病)과 같은 경우여기서 단념된 욕망은 위에서 서술한 방식을 따라 모순을 반복하는 퇴폐적인 에로스가 됩니다.5 

하지만 대상을 원하는 갈망이 너무 크기에 모순을 반복하던 욕망은 일그러져, 극단적인 방식으로 불가능한 대상을 소유하려고 들지요. 그리고 여기서 중세인들은, 아니 비단 중세인들 뿐만 아니라 현대에 들어서도, 자신을 거부한 대상을 강간과 같은 방식으로 강제적으로 취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봤던 것입니다.

 

「우울증의 무질서함을 유발시키는 성적 욕망은 여기서 관조의 대상이어야만 하는 것을 소유하고 만지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해서 사투르노적인 기질의 비극적인 정신이상은 움켜쥘 수 없는 것을 품에 안으려는 행동의 은밀한 모순 속에서 그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6」

 

이는 20세기에 정신분석을 창안하고 발전시킨 프로이트가애도와 우울증(1917)이란 논문에서 다룬 생각과 유사합니다. 

그 역시도 리비도라는 성적충동을 바탕으로 인간심리를 이해하고자 했고, 여기서 우울증은 욕망하고자 한 대상의 철회에서 비롯된 심리가 리비도와 엮여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되었지요. 

여기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프로이트에게도 우울증이란 것은 철회된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으로의 이행(혹은 전이)이 아닌, 바로 거절당하고 포기된 그 대상에 머무는 심리로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7 우울증의 원인은 욕망의 후퇴고, 이는 중세의 교부들이 나태에 대해 내렸던 이해와 그 궤를 같이합니다.

 

여기서 현대의 정신분석이 내리고 있는 결론들은 한때 교부들의 심리학적 직관이 도달했던 결론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교부들은 잃어버리지 않는 자산으로부터의 후퇴를 <나태>로 보았고 나태의 가장 무시무시한 딸로 <절망>을 들면서 이를 실현 불가능성과 저주에 대한 앞선 두려움으로 해석했다. 

나태한 인간의 후퇴는 어떤 결함에서 비롯되지 않고, 상실로부터 보호를 약속받으려는 시도, 욕망하는 대상의 부재 속에서만이라도 그것과 함께하려는 절망적인 시도 속에서 대상을 스스로 근접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욕망의 들뜬 격양 상태에서 비롯된다.8

 

중세에서 이해되었던 나태도 신의 길이나 영적 임무라는 것 자체를 직접 걸어갔던 사람이 부리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애초부터 그러한 길을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좌절시킨 사람들의 심리에 가까웠죠. 프로이트가 이해한 우울증 역시도 가지거나 경험했던 대상의 상실에서 얻어지는 거부반응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처음부터 가질 수 없는 대상을 마치 잃어버린 대상으로 여기는 상상력에 가까웠습니다.9 그래서 우울증이 단순한 슬픔과 달리 자아에 대한 극단적인 비난과 저평가로 얼룩지는 양태를 보여주는 것이고요. 

하지만 이런 우울증은 환상 속에 단념된 대상을 놓음으로써 애도를 진행하고자 하고동시에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단념된 대상과 관계를 이어가고자 합니다.10 간단히 말해서 우울해서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떠나간 그녀의 얼굴이 뚜렷해지는 것이지요.

 

 

유령과 사랑

 

 

여기서 우울증은 현실원칙을 따르는 자아가쾌락원칙을 따르는 무의식적 충동에게 압도당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분명 상실된 그녀라는 잔혹한 사실이 현실을 구성하지만우울의 형식을 통해 그녀를 계속해서 기억하고자 하며(이때 그녀를 제외한 모든 현실이 빛깔을 잃으며 나태가 찾아오기도 하며), 이런 식의 <기억함>은 계속해서 도달하고픈 <욕망함>의 한 양태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중세의 많은 연애시들이 지향했던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낭만적 관조>라는 형식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시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사랑을 느끼는 무언가가 신적인 형상이나 희미한 유령과도 같은 존재라고 묘사하는데(특히 스틸노보 계열 시인들), 이런 유령을 향한 끊임없는 언어 조탁(彫琢) 작업이 사랑의 요체라고 봤지요.「외형적 육체가 아닌 내면적 이미지, 즉 시선을 통해 환상 속에 각인된 유령이 사랑의 기원이자 대상이다. 사람들은 이 유령의 정신적이 복제 이미지를 주의 깊게 조작하고 끝없이 관조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의 열정을 생성해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11

 

여기서 유령은 우울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형상입니다. 우울이라는 것이 상실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점에 대한 욕망의 지속(욕망적 대상의 존재론)을 구현한다고 했을 때, 애석하게도 이러한 대상 자체는 편집증적 환상 속에서만 유효한 경우가 많습니다. 술을 잔뜩 먹으니 그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는, 수많은 이별노래의 가사들처럼, 환상이 현실은 아니 듯이. 

그래서 우울증 환자들은 자기비하와 함께, 상실한 대상과 만나고자 하는 극단적인 충동으로 말미암아 합일(合一)의 가장 강력한 형태인 성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혹은 마술적인 비교(秘敎)의 강령술이나 황홀경을 유도하는 제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현대의 경우엔 사이비종교나, 오컬트 단체들이 이런 역할을 담당하죠).12

 

우울증의 몰입을 집요하게 유도하는 환상적인 상실은 사실적인 대상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울증의 치명적 전략이 직접적으로 꾀하는 것은 유령의 불가능한 포착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물건이란, 욕망이 유령을 향한 스스로의 구애 행위에 부여하는 외형적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리비도의 내사는, 비사실적인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드러날 수 있도록 사실적인 것이 스스로 명백함을 잃어가는 과정의 다양한 얼굴들 중 하나일 뿐이다.13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환상이고 유령에 대한 것이죠. 

그리고 중세의 시인들은 이런 특성을 지닌 것을 사랑이라 이해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굉장히 비극적인 형태의 사랑이라고 여겨지는데, 어쨌거나 유령이라는 것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한 수긍과 좌절로부터 발원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물론, 이런 사고방식은 맨처음부터 알아봤듯 도달하기 힘든 신적 영역과 은총에 대한 좌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후 이 부분이 중세의 낭만시로 연결된다는 것은 진정으로 흥미로운 부분일 것입니다. 막연하게 영주의 부인과 기사라는 불륜로맨스가 주를 이루었던 것이 중세의 연애테마였다고 본다면, 이런 식의 우울과 결부된 유령적 이미지에서 사랑을 찾으려는 시도가 그리 이상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좀 더 얘기를 심화시키고픈 마음이 앞섭니다(아마 아감벤도 이쪽으로 생각해서 이런 비평을 적은 것 같고요).

가령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환상 없는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 에곤 실레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아무런 환상 없이 비쩍 마른 실존적 몸뚱이에 대한 근원적인 애정과 사랑을 결부시켜서 이해하고자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신체 그 이상의 무엇을 나누고자 한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타자의 생각이나 꿈, 여러 심리들에 대한 이해…… 사랑은 바로 이런 부분을 욕망하기 마련인데, 우리가 과연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도리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곧 타자의 생각으로 여겨지는 가부장적 지배론이 아닐까요? 

구태여 아도르노의 경구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많은 경우 <이해>라는 문장은 폭력성을 내포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봤을 때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한 틀 너머에 있는 무엇들, 그러니까 마치 유령과 같은 지점을 늘 고려하면서 그것까지 사랑해보려는 자세가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한 발견을 통해 우울에 빠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 행위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유령에 형상을 부여해보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이어나가는, 그러한 불가능에 대한 가능성의 역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14

 

 

이만 마칩니다. 총총.

 


1. 조르조 아감벤,『행간』, 윤병언 역, 자음과모음, 2015년, p33-3
2. 같은 책, p34-35
3. 나태가 낳는 것은 무엇보다도 악malitia, 선善 자체에 대한 모호하고 멈출 수 없는 애증과 적개심rancor, 선을 권고하는 사람들에 대한 악의적인 저항과 소심함pusillanimitas, 영적 존재로서의 의무와 어려움 앞에서 두려워하며 꽁무니를 빼는 <왜소한 영혼>의 거리낌과 절망desperatio, 아무것도, 신의 자비조차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유죄판결을 앞당겨 받았다고 믿고 기꺼이 몰락의 길로 빠져드는 암담하고 오만한 확신과 둔감함toror, 치유를 가능케 하는 어떤 행동도 마비시켜버리는 둔하고 졸음 섞인 혼미상태 그리고 정신의 산만함evagatio mentis, 즉 자기로부터의 도주와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며 불안 가운데 계속되는 다변verbositas 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허황된 자기중심적 지론, 더불어 궁금증curiositas이 안고 있는 사라지지 않는 갈증, 보기 위해 보고 싶어 하고 항상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분해되는 갈증, 자신의 위치와 의도에 대한 불안instabilitas loci vel propositi, 부적절한 사고importunitas mentis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내세우며 자신의 생각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상태 같은 것들이다. - 같은 책, p30-31
4. 같은 책, p39
5. 사투르노적 기질의 집요한 사색적 욕구 속에 살아남은 것은 스스로의 욕망을 접근 불가능한 곳에 가두는 나태한 인간의 퇴폐적인 에로스이다. - 같은 책, p49
6. 같은 책, p54
7. 하지만 이 경우에 이어지는 것은 새로운 물건을 향한 욕망의 전이가 아니라, 예상 밖의 현상, 잃어버린 물건과 나르시적으로 동일시되는 욕망의 자아감금적 철회다. 프로이트의 논문보다 5년 앞서 출판되었고 프로이트의 연구에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해준 책이 바로 아브라함의 우울증에 대한 연구다. 아브라함의 상당히 함축적인 공식에 따르면「대상으로부터 철회한 뒤에 욕망이 자아 속으로 되돌아와 의지를 표명하는 순간 대상은 자아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같은 책, p57
8. 같은 책, p58
9.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울증은 사랑하는 대상의 사라짐에 대한 거부반응으로서의 철회라기보다는 차라리 가질 수 없는 대상을 마치 잃어버린 대상으로 보이게 하는 상상력에 가깝다. 리비도가 만약 실제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마치 무언가를 정말로 잃어버린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 이유는, 한 번도 소유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라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무언가를 마치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게 하고 또 한 번도 사실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소유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하나의 잃어버린 물건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가상의 장면을 무대에 올리기 때문이다. - 같은 책, p58-59
10. 그러나 가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애도가 우울증인 만큼, 우울증의 전략은 허구적인 것의 존재를 위해 공간을 만들고 자아가 가상현실과 관계할 수 있는 무대의 범위를 설정하고 어떤 <소유>도 경쟁할 수 없고 어떤 <상실>도 위협할 수 없는 <점유>를 시도한다. - 같은 책, p59
11. 같은 책, p65
12.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강령降靈에 빠져드는 치명적인 경향이나 황홀경 속에서의 계시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유령의 본질이 극단적으로 벌어진 이중적 성격, 악마와 닮은 마술적인 성격과 천사와 닮은 관조적인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같은 책, p67
13. 같은 책, p69-70
14. 명상에 빠진 천사는, 이미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린 해석에서처럼, <기하학>을 상징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는 다른 모든 학문들이 결국에는 형체 없는 형이상학적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는 불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끝내 본질적인 심리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스스로의 유령에 형상을 부여하려는 시도, 그렇지 않고서는 붙잡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그것을 기술적으로 정복하려는 노력을 상징한다. - 같은 책, p73